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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8> 주스토 제르바수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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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8> 주스토 제르바수티

입력
2006.06.29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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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사를 연구하다 보면 이따금씩 아주 곤혹스러운 질문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내가 느낀 최초의 의문은 어째서 영국이 알피니즘의 종주국이 되었는가 라는 것이다. 영국은 알프스가 자리 잡고 있는 유럽 대륙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작은 섬나라에 불과하다. 잉글랜드의 최고봉이라는 스카펠의 해발고도는 978m에 불과하다.

섬 전체로 범위를 넓혀 스코틀랜드의 산들을 들여다봐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최고봉인 벤 네비스의 해발고도는 1,334m이며, 그나마 두루뭉실한 앉음새를 취하고 있어 밋밋하기 그지 없다. 높이에 있어서나 험난함에 있어서나 우리 나라의 덕유산(1,614m)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질문은 형이상학적이로되 답변은 뜻밖에도 경제적 토대에서 나온다. 영국이 알피니즘의 선두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간단히 말하여 산업혁명 덕분이다. 산업혁명의 결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19세기의 영국은 당대의 최강국이었다. 부(富)는 여가(餘暇)를 낳는다. 그리고 알피니즘은 여가의 산물이다.

상기해보라. 산에 오른다는 것은 돈도 밥도 안 되는 ‘쓸데없는 짓’이다.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들이 산에 오르려 애쓸 리가 없다. 먹고 살만할 뿐더러 시간도 남아도니까 산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알피니즘은 ‘부르주아의 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등반사의 초창기에 자신의 이름을 아로새긴 산악인들의 대부분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러운 결과다. 이들은 자신의 출신 계급과 전문직업을 바탕으로 확고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한 다음 여가를 온통 등반에 쏟아 부었다. 그런 뜻에서 이들은 모두 순수한 의미의 ‘아마추어’였다고 볼 수 있다(당시의 ‘전문 산악인’이란 가이드를 직업으로 삼은 소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을 뿐이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알피니즘을 정착시키고 발전시킨 사람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계급 출신으로서 별개의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아마추어 산악인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사정은 영국 이외의 여타 유럽 선진국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탈리아의 변호사로서 1930년대 알피니즘의 최전방을 지켰던 주스토 제르바수티(1909~1946)도 그런 인물들 중의 한 명이다.

제르바수티는 이탈리아의 프레올레에서 태어나 토리노대학에서 법률과 정치학을 전공한 당대의 엘리트였다. 일찌감치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경제적 안정을 이루었지만 그에게 있어서 바이블이란 성경도 법전도 아닌 머메리였다. 제르바수티는 언제나 자신이 가장 존경했던 산악인 앨버트 머메리의 유고집 ‘알프스에서 카프카즈로’를 가슴에 품고 그가 걸어갔던 길을 완성하고 싶어했다.

그의 본격적인 등반은 22세가 되던 해인 1931년에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대상이 되었던 산이 머메리가 초등했던 몬테 시에라였다고 한다. 제르바수티는 “위대한 선배의 숨결을 함께 호흡할 수 있어서 더 없이 행복했던 등반이었다”고 회고한다.

1930년대는 알프스의 북벽 등반기이다. 당시 제르바수티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산악인으로서 프랑스나 독일의 산악인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그는 매우 지적이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등반스타일만은 첨단을 고집하여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1932년만 해도 동계등반이 보편화되자 않았던 시절이다. 그는 한겨울에 마터호른에 도전하여 목숨을 건 비박을 감행한 끝에 결국 회른리능선을 통하여 정상에 오른다. 현재의 기준에서 보면 형편 없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당시의 장비와 기술 수준을 염두에 두면 놀라운 시도였다.

1932년의 치베타 북벽에서는 끔찍한 사고가 있었다. 그의 동행인이었던 빅토르 슈바이거가 근육 마비와 탈진에 이어 광란상태로 빠져든 것이다. 제르바수티는 더 이상의 등반을 포기하고 슈바이거를 자일로 꽁꽁 묶어놓은 후 바졸러 산장까지 뛰어내려가 구조대를 이끌고 올라왔다.

가까스로 구조를 끝낸 다음 산 아래 호텔로 돌아왔을 때는 새벽 2시가 넘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호텔에서는 그의 투숙 자체를 거절했다. 제르바수티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필사의 구조활동을 벌이는 동안 그의 얼굴과 온 몸이 피투성이로 변해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랑드 조라스 북벽의 가장 유력한 도전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결국 리카르도 카신에게 초등의 영광을 넘겨주고 제2등을 기록했지만 유럽의 산악계는 초등팀보다 6시간을 줄여 재등에 성공한 그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연달아 같은 산의 동벽에 도전하여 이롱델 릿지를 통한 초등의 기록을 남긴다.

제르바수티의 가장 인상적인 등반은 프랑스의 산악인 뤼시앙 드비와 함께 한 오랑(3,564m) 북벽의 초등이다. 그는 안개가 끼고 우박과 벼락이 쏟아지는 최악의 조건 하에서 순수한 바위의 높이?1,100m가 넘는 이 거벽을 기어코 돌파해냈다. 이후 뤼시앙 드비는 제르바수티의 가장 믿음직한 동반자가 되었다. 하지만 시대는 이미 제2차 세계대전의 광풍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던 때였다.

1939년이 되자 이탈리아 산악회는 그에게 프랑스 산악인과의 파트너십을 끊으라고 종용했다. 당대의 엘리트 지성인으로 존경받았던 제르바수티는 그러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는 이후 ‘국경을 넘어서는 산악인들의 연대’를 상징하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나는 국가의 위신을 위하여 등반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등반할 뿐이다.”

산악문학작가

■ 몽블랑 뒤 타궐 새루트 찾다 추락사현재 '제르바수티 필라'로 불려

주스토 제르바수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몽블랑 뒤 타귈에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기 위하여 도전했다. 그는 자신만의 루트를 개척하여 중앙필라로 접어들었으나 악천후가 닥쳐와 하강을 결정한다. 하지만 자일 두 가닥을 모아 쥐지 않고 한 가닥만 잡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질러 100m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한다. 이 루트는 현재 ‘제르바수티 필라’라고 불린다. 향년 37세. 평생을 알프스의 험난한 벽과 얼음 위에서 보낸 우아하고 행복한 삶이었다.

사망한 이듬해인 1947년, 그의 유고집 ‘스칼라테 넬레 알피’가 출간되었다. 제르바수티 특유의 따뜻한 성품과 지적인 사유가 녹아 들어 있는 아름다운 책이다.

그는 획일화한 국가주의와 폭력적인 도그마에 맞섰던 개인주의를 옹호하고자 했던 자유사상가의 풍모를 지닌 사람이었다. 알피니즘의 본질에 대해서도 그는 열려 있는 태도를 취했다. “알피니즘을 정의하려는 나의 기도가 헛된 결말 밖에 남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객관적인 알피니즘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르바수티는 ‘개인적으로’ 산에 오르려는 인간의 욕망을 어떻게 정의하였을까? “등반은 속박과 한계에 저항하여 영혼의 자유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또한 그것은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에너지, 우아한 행동스타일, 계산된 무모함이 주는 쾌감일 수도 있다. 그것은 또 강렬한 탐미적 경험, 미묘한 감성, 미지의 세계를 탐색하려는 인간의 결코 충족되지 않는 욕망에 대한 탐구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을 합친 것이 그 욕망의 가장 훌륭한 정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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