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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넋은 말이 없고…백발 용사들 말을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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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의 넋은 말이 없고…백발 용사들 말을 잊고…

입력
2006.06.26 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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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6월이 오면 강원 속초시 설악동에 있는 한 기념비에는 3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온다. 깊은 주름과 은빛 머리칼을 훈장처럼 간직한 70~80대의 이들은 이 비 앞에서 간단한 추모식을 올리고 점차 멀어지는 기억을 하나하나 더듬어본다. 삼삼오오 모여 주변 잡초도 뽑고 쓰레기를 줍는 일도 익숙하다. 1997년부터 시작했으니 올해로는 꼭 10년째이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한국유격군총연합회 산하 KLO8240부대(스켄논부대) 속초지부(지부장 박정일ㆍ77) 회원들이다. 스켄논부대(4개 연대)는 유격ㆍ정보부대로 미군 소속으로 지휘부 100여명을 뺀 나머지 부대원 9,600여명은 모두 한국의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이 찾는 기념비는 속초시 설악동 소공원에서 비선대 쪽으로 2.4㎞ 떨어진 정고평에 있는 ‘무명용사의 비’. 기단높이 1.3㎙, 비석높이 13㎙의 이 비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5만~6만명)을 맞아 이 일대에서 싸운 수도사단, 11사단, 5사단 장병과 군번 없이 참전한 학도결사대, 호림부대의 순국장병을 추모하는 기념비다.

1965년 10월30일 한국일보사가 제1군 사령부와 강원도의 후원을 받고, 강원도내 각 기관과 독지가들의 성금을 보태 건설했다. ‘이름 모를 자유용사의 비’라는 휘호는 육군참모총장 김용배 장군이 썼고, 비문은 시인이었던 당시 38사단장 장호강 장군이 지었다.

‘최후까지 싸우다 꽃잎처럼 흩어진 호국의 신이여, 님들의 이름도 계급도 군번도 아는 이 없어도, 불멸의 충혼은 겨레의 가슴에 길이 빛나리라.’ 그러나 제막 이후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뜨면서 이 비는 점차 잊혀져 숲속에 묻혀져 가고 있었다.

이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설악산 어디에선가 숨져간 수많은 전우들의 영혼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에 참여한 박정일 지부장은 “여기에만 오면 당시의 처절했던 절규와 끔찍한 모습들이 떠오른다”고 회고했다.

스켄논부대원들은 함경남ㆍ북도에서 맹활약하며 인민군 1개 군단의 발목을 잡아 남하를 막았으며, 동쪽 휴전선이 서쪽보다 올라간 것도 설악산 전투와 스켄논부대원들의 활약 덕분이라고 박 지부장은 증언했다.

현재 스켄논부대원들 중 회원등록을 한 사람은 300명이 안 되며 속초지부 회원은 70여명이다. 이들은 모든 80대 전후의 고령이지만 자비를 털어 무명용사의 비를 돌보고 연중 자원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한 회원은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난 전우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생각에 이곳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함남 여흥이 고향인 박 지부장은 “같은 부대원들은 아니지만 설악산 전투에서 산화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비를 보살피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이곳을 찾을 때마다 느끼는 섭섭한 마음도 은근히 털어놓았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장에서 부질없는 욕심은 다 버렸습니다. 우리야 운 좋게 살아 남아 세상살이도 즐겼으니 여한이 없지만 먼저 가신 분들이 단지 미군 소속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유공자로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회원들은 지금까지 현충일이나 6월25일, 휴전일인 7월27일을 정해 이곳을 찾아왔으나 지난해부터 방문날짜를 9월로 바꾸었다. 한여름 땡볕을 뚫고 찾아올 수 기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라지면 이 비를 돌볼 사람은커녕 더 이상 기억할 사람도 없겠지요?”

올해에도 20여명의 동료들과 함께 둘러볼 계획이라는 노병은 “모처럼 부대원들을 만나게 돼 좋다”고 했지만 얼굴에는 짙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속초=글ㆍ사진 곽영승기자 yskwa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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