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정궁 경복궁 터는 과연 천하의 명당일까. 경복궁은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으로 이어지는 내사산(內四山) 안에 있어 명당 중 명당이라는게 다수 주장이다. 그러나 조선 건국 시기, 북악산을 배경으로 삼아 궁을 배치하자는 정도전에 맞서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아야 한다는 등 논란도 있었다. 조선 중기에는 창덕궁이 더 명당이라는 여론이 있었고, 일제 때 경복궁 주변에 사는 집권자들의 말년이 좋지 못하자 명당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었다.
한양대 건축대학 주최로 24일 열리는 ‘양택풍수 대토론회-경복궁 터에 대한 재해석’은 국내 풍수 전문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경복궁 터를 풍수지리적으로 살피는 자리다.
김수한 한국풍수지리협회 회장은 주제발표문에서 “풍수에서 산은 정(靜)하기 때문에 음(陰)으로, 물은 동(動)하기 때문에 양(陽)으로 보는데 한양은 백두산에서 북한산을 거친 지맥이 이어지고 물 역시 남한강 북한강이 양수리에서 합류해 한강을 이뤄 도시를 휘감으니 한양은 한 나라의 중심이 될 만큼 산수 교합, 즉 음양 교합이 완벽하다”고 주장한다. 박시익 명당건축사무소 대표는 “명당은 좋은 기운이 모이는 땅이고 그 가운데 기운이 특히 많은 곳이 혈(穴)”이라며 “경복궁 터는 서울의 대표적인 혈”이라고 소개한다.
채영석 한국풍수지리연구소 연구위원은 “서울의 내사산 가운데 청룡(낙산)이 백호(인왕산)와 주작(남산)에 비해 너무 취약하다”며 “그래서 조선 왕조 내내 장자(長子)보다 차자(次子)가 득세했고 외척의 발호가 심했다”고 주장한다. 동쪽의 낙산이 허하다 보니 같은 방향의 일본으로부터 외침을 받았는 견해도 밝힌다.
명당수(明堂水)의 부족은 경복궁 창건 때부터 제기된 결점이다. 서북쪽이 낮고 북악산과 인왕산이 돌산이어서 물이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종은 궁궐 서쪽에 연못을 만들고 이를 금천(禁川)으로 끌어들인다. 금천은 경복궁 북쪽 신무문에서 궁성으로 들어와 경내를 지난 뒤 근정문 앞을 통과한다. 이듬해 경회루를 축조해 연못을 넓히는데 이 역시 명당수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채영석 위원은 이를“북악으로 들어온 지기(地氣)와 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일제도 이 같은 뜻을 간파, 1915년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우면서 금천을 메우고 기를 단절했다는 것이다.
김수한 회장은 “경복궁 외곽의 청계천은 북악산, 인왕산 사이에서 득수(得水)해 경복궁을 감싸며 동쪽으로 흐른 뒤, 동에서 서로 흐르는 한강과 합류, 경복궁 전체를 태극 형상으로 감싼다”며 “이는 용의 생기가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서울사이버대 교수인 강환웅 대한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경복궁내 아미산(峨嵋山)과 교태전(交泰殿)에 의미를 부여한다. 아미산은 경회루 연못을 파면서 나온 흙으로 만든 인공 산으로, 크기는 흙더미 정도에 불과하지만 북악산으로 이어진 맥을 이어받는 곳이라고 한다. 침전으로 사용된 교태전은 뒷면이 요철(凹凸), 즉 남녀교합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아미산을 휘감으려 하는 것이라고 강 이사장은 주장한다.
박광희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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