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아련한 기억의 갈피를 헤집고 떠오르는 책이 있다. 중년 연배면 대개들 알 터, 어렸을 적 눈시울 적시며 읽었던 '저 하늘에도 슬픔이'다. 1960년대 중반 대구 변두리의 움막에 살면서 편찮은 아버지와 동생들을 부양하는 초등학교 4년생 이윤복의 일기를 엮은 책이다.
장마철이면 동냥과 껌팔이도 되지 않아 온 가족이 굶은 채 질척한 방바닥 위에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는 장면이 선연하다. 비슷한 또래여서 느낌이 더 절절했으리라. 장마는 그렇게 비를 끔찍이 싫어하던 윤복이의 고단한 삶의 이미지로 남았다.
▦중순부터 한반도 발치에서 내내 꾸물거리던 장마전선이 이제야 제대로 허리에 걸쳐질 모양이다. 당초 일찍 시작되리라는 예보처럼 지난 주엔 전국에 때 이른 호우가 내렸지만 결국 평년과 비슷한 날(6월 23일)에 시작되는 셈이다.
장마는 한 달간 우리 일년 강수량의 30~50%나 되는 비를 뿌려 수자원 확보에 결정적 역할을 하고, '유월 장마에는 돌도 큰다'는 속담처럼 만물의 왕성한 생육을 돕기도 하지만 그래도 장마는 그닥 반가운 내객은 아니다. 오죽하면 옛 어른들도 '삼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고 했을까.
▦한국전쟁기의 농촌가족 이야기를 소재로 한 윤흥길의 중편소설 '장마'에서의 느낌은 더욱 직접적이다. 시종 지루하고 심란하고 음울한 느낌이 습기처럼 피부에 끈적이며 달라 붙는다.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하게 적시는' 장마의 시작과 함께 국군 소위로 전쟁 나간 외삼촌의 전사통지서가 날아들고 이로 인해 빨치산 아들을 둔 할머니, 또 꼬임에 빠져 외부인에게 빨치산 삼촌의 행적을 누설한 어린 '나' 사이에 빚어지는 대립과 갈등이 줄거리다. 장마는 말하자면 일상을 느닷없이 깨며 닥쳐 든 불화와 갈등의 메타포다.
▦하지만 '장마'는 빨치산 삼촌의 죽음을 암시하면서 화해로 끝을 맺는다. '임종의 자리에서 할머니는 내 지난 날을 모두 용서해 주었다. 나도 할머니의 모든 걸 용서해 주었다. …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장마는 젖은 실타래같은 속내에 이미 극복의 실마리를 품고 있었던 셈이다.
하긴 장마 뒤 갓 씻긴 하늘빛처럼 맑고 투명한 것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우리가 겪고 있는, 끝이 안 보이는 듯한 어려움과 갈등도 사실은 장마와 같은 것인지 모르겠다. 장마철을 맞아 괜스레 울적해지는 마음을 추스리려 이런저런 소회를 풀어 보았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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