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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7> 볼프강 귈리히(1960-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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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7> 볼프강 귈리히(1960-1992)

입력
2006.06.21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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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의 루트를 순수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바윗길’이다. 혹자는 묻는다. 바위에도 길이 있느냐?. 바위꾼들은 피식 웃으며 되묻는다. 원래부터 길이 나 있던 곳도 있는가? 태초의 세상에 길이 있었을 리 없다. 길이란 인간이 다니면서 생겨난 것이다. 바윗길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도 오르지 않았을 때 그곳에는 길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처음 그곳에 오르면 길이 생겨난다. 이름하여 바윗길이다.

이 바윗길에는 난이도의 등급이 엄격하게 적용된다. 즉 쉬운 바윗길과 어려운 바윗길이 있는 것이다. 미국 요세미테에서 기안되어 현재 전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등반 난이도의 등급은 이 세상의 모든 길을 다섯 등급으로 나눈다. 1급은 손이나 발을 쓰지 않고 걸어가는 하이킹 루트다. 2급은 가끔 손을 써야 하는 길, 3급은 손을 자주 써야 하는 길, 4급은 추락시 위험에 처하게 되는 길이다. 아주 간단한 암릉등반 루트라면 4급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자일을 사용해야 하는 본격적인 암벽등반 루트는 5급에 해당한다.

이 5급은 다시 5.0에서 5.9까지 10단계로 나뉜다. 암벽등반 기술이 없는 사람도 오를 수 있다면 5.4 이하로 평가된다. 틈새에 손 끼우기 같이 기본적인 기술이 요하는 길이라면 5.4에서 5.7 정도로 평가한다. 지속적인 훈련과 순간적인 파워 그리고 안전장치의 숙련된 사용이 요구된다면 5.7에서 5.9 정도다. 요컨대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바윗길의 난이도를 5.9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기록과 한계는 깨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법. 어느 날 누군가가 인간이 도저히 오를 수 없을 것 같은 바위를 가리키며 그 난이도를 묻는다. 되돌아올 답변이란 빤하다. “저기는 오를 수 없어.” 그가 다시 묻는다. “만약 올라간다면?” 그리고는 그가 코웃음 치는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 바위에 길을 내고야 만다면? 등급체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는 수밖에 없다. 바로 5.10이다. 세계적인 암벽화 회사로 유명한 ‘파이브텐’이라는 브랜드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5.10이란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최고의 경지’를 뜻한다. 우리 말로 옮기자면 ‘만점’(滿點)이라고나 해야할듯 하다.

난이도가 5.10을 넘어서면 등급체계는 보다 세분화한다. 5.10이라는 난이도를 다시 a,b,c,d로 나누는 것이다. 5.10급의 난이도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5.10d다. 그렇다면 이것이 궁극의 바윗길인가? 그렇지 않다. 어느 날 또 다른 누군가가 나타나 5.10d로 평가된 바윗길보다 훨씬 더 어려운 바위에 길을 내고야 만다. 그러면 그 길은 5.11a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그 다음은? 또 그 다음은? 현대 등반의 역사란 어떤 뜻에서 곧 ‘난이도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선두에 서서 끝없이 기록을 갱신해나갔던 산악인이 바로 볼프강 귈리히(1960-1992)였다.

1960년 독일의 팔츠에서 태어난 그가 암벽등반의 세계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14세 때였다. 독일인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이자 미국 요세미테에서 거벽등반 기술을 수입해온 라인하르트 칼 밑에서 등반기술과 철학을 익힌 그는 에어랑켄 대학에서 스포츠과학을 전공하며 자신만의 등반스타일을 만들어나가기 시작한다. 볼프강 귈리히는 근력을 키우기 위한 섬세하고도 지독한 트레이닝, 자일이나 파트너 없이 저 혼자 절벽과 승부하는 놀라운 담력, 실내 암장에서나 가능할 법한 기술을 극한 상황의 고산에서도 적용시키는 겁 없는 도전 등으로 현대등반사에 독보적인 족적을 남겼다.

귈리히는 최고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바위들을 찾아 전세계를 순례한 떠돌이 철새였다. 그가 미국 캘리포니아 타호 레이크에 있는 ‘그랜드 일류전’(5.13c)에 붙어 벌인 8일간의 사투는 전세계 바위꾼들 사이에 하나의 신화다. 기어코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그 바위에 오른 귈리히는 너무 탈진한 나머지 이후 30시간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잠조차 잘 수 없었다고 한다.

미국 요세미테의 ‘세퍼릿 리앨러티’(5.11d)를 하드프리 솔로로 돌파한 것은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는 파트너도 자일도 없이 수직 200m의 바위 절벽을 기어오른 다음 천정처럼 가로막힌 6m의 바위를 거꾸로 매달려 통과한 뒤 그 위로 사뿐히 올라탔다. 널리 알려진 그의 별명 ‘크랙의 발레리나’가 탄생한 것은 이 기념비적 등반을 통해서였다.

전세계 5.13급의 바윗길을 모두 섭렵한 그는 이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바로 5.14급의 바윗길이다. 귈리히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것은 독일 프랑켄유라의 ‘액션 다이렉트’다. 145도로 기울어져 있는 길이 12m의 오버행이다. 그는 무려 11일 동안이나 이 바위에 매달려 연구와 훈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새 길을 뚫고야 만다. 오직 손가락 끝만으로 허공에 매달린 채 체공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방법으로 바삐 몸을 놀려 이 코스를 통과하는 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7초였다. 인류 최초의 5.14d급 난이도의 바윗길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이다.

그는 자신이 상상해내고 훈련했으며, 끝내 실천에 옮긴 최첨단 암벽등반 기술을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고산 거벽등반에도 적용시켰다. 귈리히가 카라코람의 네임리스타워와 파타고니아의 파이네 중앙탑에서도 5.12급의 고난도 등반을 거침없이 해치웠을 때 세계 등반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도대체 이 끝없는 난이도 갱신의 질주는 언제쯤 잦아들 것인가? 사람들은 모두 언젠가는 그가 ‘인간이 오를 수 없는’ 바위에 오르다가 추락사할 것이라고 수근거렸다. 하지만 이 익살맞은 독일 청년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바삐 마감했다. 1992년 8월 31일, 볼프강 귈리히는 독일의 무한질주 고속도로 아우토반에서 한껏 엑셀을 밟아대다가 이 세상을 떠났다. 서른 두 해 동안 타오른 불꽃같은 삶이었다.

▲ 현대 암벽등반의 다양한 스타일

추락·휴식 여부따라 4종류… 난이도 못지 않게 중요시

현대 암벽등반에서 난이도 못지 않게 중시하는 것은 스타일, 즉 ‘어떤 방식으로 올랐느냐’이다. 루트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등반을 시작하여 첫 번째 시도에서 단 한 번도 추락하지 않고 자유등반으로 오르는 것을 ‘온사이트’(on sight)라고 한다. 이에 비해 한번 이상 경험해본 루트를 추락하지 않고 오르는 것을 ‘레드 포인트’(red point)라고 한다. 등반 시도 중 추락했을 때 내려와 휴식을 취한 뒤 다시 오르는 것은 ‘요요잉’(yoyoing)이며, 추락한 지점에 매달려 있다가 다시 오르는 것은 ‘행도깅’(hang dogging)이다.

볼프강 귈리히처럼 첨단의 암벽등반가들은 이 등반스타일을 매우 엄격하게 따진다. 1979년 그가 뉴욕 근교 샤왕겅크의 ‘수퍼크랙’(5.12c)을 오른 것은 3일간의 요요잉을 통해서였다. 1987년에 그가 개척한 미국 조슈아트리의 ‘문빔크랙’(5.13b)과 독일 프랑켄유라의 ‘월스트리트’(세계 최초의 5.14b)는 레드 포인트 방식에 의한 등반이었다. 1988년 그가 참가했던 독일 트랑고원정대의 네임리스타워 유고루트의 돌파 방식 역시 레드 포인트였다.

그가 선호했던 ‘자유등반’이란 또 다른 패러다임에 속한다. 안전장비를 설치하되, 오직 추락시에만 그것에 의탁할 뿐, 등반시에는 전혀 그것을 이용하지 않는 등반방식을 말한다. 간단히 말해 확보물을 잡거나 딛지 않을뿐더러, 그것에 매달려 휴식을 취하는 일도 용납하지 않는 등반스타일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독 자유등반’이란 어떠한 안전장비도 사용하지 않고 파트너도 없이 혼자 오르는 스타일이다. 이 경우 추락은 곧 사망과 직결될 수밖에 없다. 볼프강 귈리히는 요세미테 최난코스들 중의 하나인 ‘세퍼릿 리앨리티’(5.11d)를 바로 이 ‘단독 자유등반’ 스타일로 돌파해냈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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