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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노래방의 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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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칼럼] 노래방의 법칙

입력
2006.06.2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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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라고 시키다가 막상 노래하면 아무도 듣지 않는다."

지난 13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지금은 물러났지만)가 기자들과의 오찬간담회 도중 "정책정당이 돼야 한다고 언론이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정작 정당이 열심히 정책을 내놓아도 많이 다뤄주지 않는다"며 한 말이다.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노래방에선 왜 그럴까? 한국인 특유의 의례성(儀禮性) 때문이라는 게 전문 학자들의 분석이다. 한국인들은 헤어질 때마다 "언제 꼭 한번 만납시다"라고 말하지만 '언제'는 결코 기약할 수 없다. 그냥 "너와 나는 또 볼 사람이다"라는 의미의 의례적 인사말일 뿐이다.

● 노래 시켜놓고 안듣는 '의례성'

이러한 의례성은 대인관계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사회적 비판도 의례성이 매우 강하다. 언론은 당위적 차원에서 정책을 강조하지만 정책 중심 보도를 할 뜻이 없다. 독자들이 정책 관련 기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례적 비판의 문제를 '노래방의 법칙'이라 부를 수 있겠다. 비판은 하되 그 비판의 실천 가능성과 효용은 내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속 편한 자세라고나 할까? 이는 언론의 문제인 동시에 한국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관행이기도 하다.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언론과 지식인의 정치 비판에서 나타나는 한가지 일관된 특성은 비판의 준거가 서양 민주주의라는 점이다. 즉, 우리의 정치비판 문화는 현실탐구에 근거하기보다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서양 민주주의와의 비교평가를 통해 형성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비판은 하늘을 나는 반면 현실은 땅을 기는 게 우리의 익숙한 풍경이다.

이게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시절이 1950년대였다. 당시 대학에서 민주주의를 배운 학생들 중 사회참여 의식이 강한 학생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거의 종교 수준이었다. 실행에 옮기진 않았지만,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이승만 암살 계획까지 세운 대학생들도 있었다.

민주주의가 성숙 단계에 접어든 지금도 한국의 특수성보다는 세계적(사실상 서구적) 보편주의를 역설하는 것이 지식인다운 자세로 평가받는 건 여전하다. 역대 독재정권들이 '한국의 특수성'을 오ㆍ남용한 것에 대한 반작용도 있지만, 그만큼 한국의 학문 수준이 현실에 비해 높거니와 앞서간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판의 의례성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현실과는 동떨어졌을 망정 보다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자는 진취성과 이상주의는 긍정 평가할 만하다. 100을 목표로 해야 50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느냐는 셈법이다. 실제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은 그런 이상주의에 크게 힘입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그런 명(明)이 있는 만큼 암(暗)도 있다. 의례적 비판은 과도한 기대를 유포시켜 '좌절과 환멸'의 악순환을 불러올 수 있다. 당위 일변도니 비판의 전문성도 존중받지 못하고 책임지는 문화도 정착되기 어렵다.

● 언론ㆍ지식인 정치비판도 의례화

비판의 의례성은 언론과 지식인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일반 네티즌들의 정치 담론도 '현실 분석'은 아예 건너 뛰고 당위의 역설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강하다. 현실이 이러하니 당위를 이렇게 수정하고 타협하자는 식의 대안은 지지를 얻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논쟁은 당위의 충돌일 뿐 소통을 통한 접점 찾기는 기대하기 힘들다.

듣진 않을 망정 노래 부르라고 시키는 정도의 관심이라도 보여주는 게 고맙긴 하지만, 노래도 들어준다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마찬가지로 언론사는 정책 기사를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더 투자를 하고, 언론단체들은 정책 기사에 대한 시상 제도를 강화하면 좋겠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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