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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가상 인터뷰-대화] <16> 민족경제론 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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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가상 인터뷰-대화] <16> 민족경제론 박현채

입력
2006.06.19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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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대표적인 진보적 경제학자. 전남 화순이 고향인 그는 광주서중 4학년 재학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빨치산에 가담해 20세 미만의 소년들이 중심이 된 소년 중대의 문화부 중대장으로 활동했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소년 전사 ‘조원제’의 모델이 바로 그다. 1952년 백아산에서 내려오다 박현채와 함께 체포된 이의 증언에 의하면, 박현채는 “하도 영리해서 산에서 죽지 말고 살아남아 더 큰 일을 하라고 당에서 하산시켰다”고 한다. 그 뒤 박현채는 전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한 다음 경제학자 및 경제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과학 분야에서 박현채의 가장 큰 공헌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사상적 불모기에 마르크스주의를 보존하여 후대에 넘겨준 것이다. 한편, 박현채의 경제사상은 ‘민족경제론’으로 불리는데 이는 1978년에 출간된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그는 기존에 경제학에서 사용하던 지역적 개념인 ‘국민경제’라는 용어를 실천적으로 지양하여 ‘민족경제’라는 범주를 설정하였다. 민족경제란 대외의존적 국민경제가 아니라 자주적이고 자립적이며 민주적인 국민경제이며, 더 나아가 통일된 민족경제를 의미한다.

여기서 경제 자립의 평가 기준은 “민족에 의한 국민경제 재생산조건의 장악, 자기완결적인 자율적 재생산 메커니즘의 실현, 경제성장 또는 경제활동 결과의 국민적 확산 메커니즘의 확보, 국민경제 안에서 외국자본 활동 영역의 부정으로 되는 국민경제와 민족경제의 통합” 등이다. 박현채의 민족경제론은 1960년대 이후 외자 의존 및 수출 주도의 성장제일주의 공업화 전략에 대한 대항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그는 1980년대 중반에 나름의 한국 자본주의 발전단계론을 제시하면서 사회구성체 논쟁을 학문 영역에 끌어들였다. 최근에 박현채 전집(전 7권)이 간행되었는데, 논문, 수기, 대담, 좌담 등 고인의 글과 말이 1권에서부터 6권까지 시대순으로 묶였고 7권은 사진 및 기타 자료 등으로 채워졌다(도서출판 해밀).

이재현(이하 현) 선생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문익환 목사님이랑 김진균(사회학자, 전 서울대 교수) 선생님이랑 정윤형(경제학자, 전 홍익대 교수) 선생님이랑 전철환(전 한국은행 총재) 선생님, 정운영(경제학자, 전 한신대 교수) 선생님도 안녕하시죠?

박현채(이하 박) 허허, 그래, 문목사님은 나보다 한 해 먼저 이곳에 오셨고, 나머지 양반들은 여기 온 지 얼마 안되니까 내가 선배 노릇 좀 하고 있지. 조영래(전 인권변호사)군, 김병곤(전 민청련부의장)군, 이범영(전 한청협의장)군도 잘 지내고 있어. 문학평론을 하던 채광석(학생운동권 출신 시인, 비평가)이랑 김도연(학생운동권 출신 비평가)의 안부도 궁금하지?

현 네.

박 여기는 양극화도 없고 비정규직도 없어. 죽으면 다 똑같아. 채광석군은 매일 ‘심심해서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네

현 이번에 나온 전집은 원래 선생님 서거 10주기를 기념해서 내려던 건데 여러 이유로 해서 한 해 늦게 나오게 되었다더군요. 어쨌거나 전집 출간 축하드립니다. 근데, 선생님, 오늘날에도 유효한, 민족경제론의 합리적 핵심은 한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박 우선, 첫째는 국민경제의 재생산 조건을 국내에서 장악해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국가가 경제 영역에 올바르게 개입해야 한다는 거라네.

현 국가의 경제 개입이라고 하면 신자유주의적 방임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얘기네요?

박 그렇지, 시장과 경제 계획을 조화시킨달지 시장과 공공영역을 공존시켜 나간달지 하는 과제, 그리고 이 과제들을 국민 다수의 민주적 통제를 통해서 해결해나가는 건 여전히 중요해. 이것은 국가를 경유해야만 가능한 걸세.

현 그런데,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제는 글로벌화랄지 세계화라는 상황에서 국민국가의 경제적 진로를 고민해야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 것 아닌가요? 34년 전에 자립 경제를 말하던 때와는 여건이 아주 달라졌으니까 말입니다. 중국이나 북한, 혹은 베트남의 경우를 놓고 얘기하더라도 자력 갱생이라든가 자립 경제라는 게 전일적인 자본주의 세계체제 안에서는 환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까?

박 세계화라는 것도 각각의 국민국가 제도를 통해 실현이 되는 거야. 국민국가는 세계화시대에 있어서 국민경제가 추구하는 효율성이라든가 평등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일련의 정책 묶음을 마련하고 시행하는 장(場)인 것이지. 그런데 이제는 박정희의 방식으로 국가를 운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내부적으로나 대내적으로 말이야. 여기서 특정한 정책의 묶음을 선택하는 과정으로서 민주주의가 중요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 거지. 달리 얘기하면 서로 다른 정책 세트들이 민주주의적 정치 과정을 통해 국가라는 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신자유주의 노선이라는 게 바로 하나의 정책 세트인 것이고 진보 진영의 여러 입장들도 각기 하나의 정책 세트를 이루고 있는 거라네.

현 박정희식 공업화 전략이 상당히 성공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되는데요. 그 결과 한국은 지금 나름대로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구요. 박정희에 대해서는 재평가할 필요를 느끼시는가요?

박 내 민족경제론에서 경제 성장에 필요한, 결여된 자본에 대한 고민이 적었던 것은 사실이네. 하지만 한국경제의 성공을 박정희 개인의 리더십 차원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보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국가는 경제 영역에 대해서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하고 있었고, 자본을 포함해서 자원들 전체를 나름대로 합리적으로 배분하고 활용할 수 있었던 거지. 그런데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이 과정에서 엄청난 정치적, 정책적 시행착오를 겪기도 했네. 정치적 탄압과 사회적 억압을 포함해서 아주 값비싼 비용을 치루기도 했고 말이야. 무엇보다 직접 생산 담당자인 민중 전체의 고귀한 기여는 물론이고 전사회적 교육열에 바탕을 둔 양질의 노동력 덕분에 한국 경제가 성장한 것이지.

현 결국, 이 문제는 한국의 ‘제도’들을 포함해서 한반도 전체의 역사적, 지정학적 특수성하고 연관되는 걸 텐데요.

박 그렇지, 흔히 말하는 국가경쟁력이라는 것은 국민국가 단위에서 생산요소들, 특히 의제적 상품으로서의 노동력을 결합하고 동원하고 이용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것이네. 즉 이 특수한 역사적 방식의 효과가 국가경쟁력인 셈이지. 그런데 이 특수성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국민국가의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형성된 제도에 의해서 다소간에 고정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어. 관료제, 민족주의, 가족주의, 교육열, 문화적 역동성 등이 한국의 경제 제도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인데, 아무튼 이러한 방식의 차이나 제도의 역사적 특수성은 장기적, 미시적으로 보아서는 시장의 힘에 의해 효율적으로 제거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특정한 국면에서 쉽사리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 노무현 정권의 졸속적인 한미FTA 추진도 이러한 점에서 문제가 있는 거라네.

현 마찬가지 논리에서 세계화의 거센 물결에 대해서도 제도적, 역사적 특성을 감안하여 우리가 주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개방적인 태도를 갖되 말이지요.

박 그럼. 성장 전략, 발전 모델, 축적 방식 등등 그 언어적 표현이 무엇이 되던 간에 이러한 방식의 수혜자 혹은 희생자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잘 살펴야 하는 거야.

현 여전히 수혜자는 재벌이고 희생자는 다수 국민인 거네요. 그런데 재벌은 여전히 경쟁력 제고라든가 외국 금융자본의 지배 위험이라는 측면에서 여전히 우대를 받고 있는 반면 다수 국민은 점점 더 경제적, 사회적 양극화로 몰리고 있는 거구요.

박 앞으로는 시장의 요구 외에 사회 전체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 효율성에만 사로잡히지 말고 시장을 넘어서서 지역이라든가 공동체를 더욱 더 중시해야 하는 거야. 또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로 세계화에 대한 전략을 짤 때에는 남한과 북한을 민족경제라는 범주 안에서 함께 사고할 수 있어야 해. 남북간 경제 분업의 문제를 포함하는 ‘개방적 민족경제’를 새롭게 구상해야 할 단계에 이른 거지.

현 그런 취지에서 선생님의 민족경제론은 여전히 유효한 거로군요. 전집 발간사에서 “신자유주의란 이름 아래 우애와 협동의 세상 대신 이웃을 죽이는 살벌한 경쟁과 불평등의 참혹한 현실이야말로 박현채를 필요로 한다”고들 했는데 바로 그런 이유에서겠지요.

박 나로선 매우 쑥스러운 일이라네.

현 죄송합니다. 선생님을 그냥 편히 쉬게 해드려야 하는데요. 요즘 이구동성으로 대안적인 전망과 진보 진영의 혁신이 필요하다고들 말하는데요. 선생님의 신념과 열정을 되새기면서 저희들이 더 노력하겠습니다.

박 그나저나 모두들 건강에 힘쓰고 오래들 살게나. 이곳에 오게 되면 후회되는 일이 많아.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한 일들 말일세. 그러니 오래 살아남는 게 중요한 거야.

문화비평가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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