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의 그림자가 드리우면 ‘감독 경질의 악령’이 고개를 든다. 선수들의 무기력한 플레이가 도마 위에 오르면 사령탑이 앉았던 벤치는 싸늘한 무덤으로 변한다. 2006 독일월드컵도 냉혹한 ‘데쓰 게임’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벌써 첫번째 희생자가 나왔다. 조별리그 C조에서 2패로 탈락이 확정된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일리아 페트코비치(61) 감독이 18일(한국시간) 대표팀 사령탑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네덜란드, 아르헨티나, 코트디부아르가 속한 ‘죽음의 C조’에서 세르비아-몬테네그로가 16강에 진출하는 것은 애당초 쉽지 않았던 일. 하지만 16일 아르헨티나에게 0-6의 대패를 당하자 분위기는 잔인하게 변했다. 유럽지역예선에서 10경기 1실점의 철벽 방어를 앞세워 6승4무의 성적으로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본선에 진출시킨 페트코비치 감독을 낙마시킨 것은 ‘정실인사’로 인한 구설수와 수비 위주의 경기 운영, 그리고 소속팀 선수들의 반발이었다.
월드컵 직전 자신의 아들인 두샨 페트코비치를 대표팀에 발탁해 팀워크가 산산조각 났고, 1차전인 네덜란드전에선 지나치게 수비위주의 경기운영을 한 것이 패인으로 지적 받았다. 급기야 오그넨 코로만, 마테야 케주만 등 간판선수들이 감독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고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는 아르헨티나전 0-6의 대패로 이어졌다.
이처럼 월드컵 기간 중 명장들이 해임통보를 받거나 사퇴의사를 밝히는 장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유로2000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끈 로저 르메르 감독은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단 1승과 1골도 기록하지 못하고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그러자 무려 36년 만에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은 프랑스 언론은 르메르 감독에게 십자포화를 퍼부으며 지휘봉을 빼앗았다.
지난 94년 미국월드컵에서 브라질에게 우승컵을 안겼던 카를루스 파헤이라 감독은 98년 프랑스월드컵 때 사우디아라비아를 이끌고 본선 무대를 밟았다가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뒤 곧바로 짐을 쌌다.
특히 98년 프랑스월드컵은 ‘감독들의 무덤’으로 악명 높았다. 한국의 차범근 감독은 1차전에서 멕시코에 1-3으로 패한 데 이어 네덜란드에게 0-5의 대패를 당해 대회기간 중에 불명예 퇴진을 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폴란드 출신으로 튀니지 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던 헨리크 카스페르차크 감독도 1무2패로 탈락이 확정되자 감독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그나마 본선 무대라도 밟은 감독들은 나은 편이다. 지역예선에서의 패배로 옷을 벗은 감독들이 허다하다. 브라질 대표팀의 룩셈부르고 감독은 2002년 월드컵 남미예선에서 칠레에 0-3으로 패한 뒤 쫓겨났고, 2006 독일월드컵 예선을 치르는 동안 움베르토 쿠엘류, 요하네스 본프레레 등 두 명의 외국인 감독을 자른 한국 대표팀도 ‘감독의 무덤’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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