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웅 지음/ 서해문집 발행ㆍ5,900원
‘하얀 나무로 만든 책상과 걸상에 두 사람씩 갓과 초립을 쓴 채 소학이라는 한문책을 펴놓고 앉았습니다. 선생님이라는, 얼굴 뻘겋고 수염이 세 갈래로 난 어른이 갓을 쓰고 서서 기다란 담뱃대를 입에 물고 빨다가 그 담뱃대로 또 칠판을 딱딱 때려 가면서 글을 가르쳤습니다….’
소파 방정환이 묘사한 모교 보성소학교의 교실 풍경이다. 동몽(童蒙ㆍ장가를 가지 않은 사내 아이)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한 조선 정부가 서당을 정비하고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설치한 학교가 소학교다. 바닥에 무릎을 꿇거나 앉아야 했던 서당과 달리, 소학교에서는 책상 걸상에서 공부했다. 서당에서는 훈장이 가르쳤지만 소학교는 사범학교에서 전문 지식과 교수법을 익힌 교원이 가르쳤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우리 사회 전체가 그랬듯, 당시 교육 현장에서도 큰 변화가 있었다. ‘우리 학생들이 나아가누나’는 그 격변의 시기, 학교 현장의 모습이다. 교육의 역사를 살피는 교육사이자 당대 사람의 삶을 보여주는 생활사이다. 저자는 서울대 사범대학 교수.
첫 소학교는 1894년 문을 연, 오늘날 교동초등학교의 전신이다. 당시 소학교는 우리 역사와 우리 글 가르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정했다. 수신(修身) 독서 작문 습자 산술 체조가 기본 교과였고 한국지리 역사 외국어 등이 추가되기도 했다.
학생들은 오전 8시에 등교하고 오후 3시에 수업을 마쳤다. 일곱 살 이상 남자 아이가 다닐 수 있었는데 수염 난 학생도 있었으니 학생들의 나이 차이가 대여섯살 심지어 열살 이상이기도 했다. 나이 많은 학생들은 담뱃갑을 조끼에 넣고 다니며 담배를 피웠는데 공부는 아무래도 어린 학생보다 떨어졌다.
선생님은 공부 못하는 학생은 바지를 내리게 하고 버드나무 가지로 볼기짝을 때렸다. 반면 어린 학생들은 공부는 잘 했지만 철이 없어서인지 너무 소란스러웠다. 나이 든 학생은 학생회를 만들고 정치적인 일에도 참여했다.
학교에서 공부만 한 것은 아니다. 특히 운동회는 학생에게도, 주민에게도 큰 잔치였다. 서울에서는, 운동장 없는 학교가 많아 대개 훈련원이나 사찰, 고궁 등에서 열었다. 하늘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진동했다.
학생들은 매 학기 시험을 보았다. 당시 한 공립소학교에서는 ‘법국(法國ㆍ프랑스)은 무슨 이유로 대란하며 나파윤(拿破倫ㆍ나폴레옹) 제1황은 무엇 때문에 영웅인가’ ‘아(我) 대한은 어떻게 정치를 하여야 세계 일등국이 되며…’ 등의 문제가 출제됐다. 성적이 좋으면 신문에 이름이 나기도 했다.
일본이 외교권을 빼앗고 내정을 간섭하면서 엄청난 변화가 온다. 조선어 시간을 줄이고 일본어 시간을 늘렸으며 소학교를 보통학교로 개편해 고등교육의 기회를 줄였다. 교과서에는 동해가 일본해로 표기되고 일본 자본가가 자선가로 나온 반면 조선인은 규율 없는 민족으로 등장했다. 그러자 노예교육이라며 자퇴하거나 일어를 가르치지 않는 사립학교로 옮기는 학생이 늘어났다.
일본은 1910년 대한제국 강점 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교원들은 환도(還刀)를 차고 수업을 진행했다. 일본인 교장과 교원은 조선인 교원을 폭행하고 차별했다. 총독부에 순응한 조선인 교원도 있었지만,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민족해방운동에 앞장선 교원도 많았다. 수업도 일본어와 일본사 교육이 우선이었다.
일본 국가 ‘기미가요’, 일장기를 찬양하는 ‘히노마루’ 같은 노래가 집중 보급됐다. 학적부 작성, 품행평가, 신체검사 등을 통해 일제에 대한 순응도와, 훗날 군인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 등을 살폈다.
매일 아침 조회는 경례, 호령, 훈화, 검열 등을 통해 명령과 복종의 상하관계를 드러내는 자리였다. 그러다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천황 숭배에 젖기도 했는데, 모두 그러지는 않아서 “천황폐하”를 외치도록 강요한 헌병을 냇가에 처넣은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 정신이 이어져 3ㆍ1운동 때 어린 보통학교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고문 당하고 죽은 학생도 있다. 이들은 훗날, 굳건한 독립운동가로 성장해 일제와 맞서 싸웠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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