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는 여느 독재자들처럼 총칼로 집권하지 않았다. 히틀러의 무자비한 일당 독재 체제 와 전쟁 도발을 가능케 한 최대의 무기는 그가 현란한 화술로 웅변한 ‘강성 독일 재건’의 꿈에 취한 독일 국민의 집단적 광기와 양심을 저버린 지식인들의 철저한 침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일인이여! 당신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무관심의 껍질을 벗겨라”고 호소하는 전단을 뿌리다 반역죄로 처형된 한스, 소피 숄 남매를 독일인들이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는 데는, 그런 뼈아픈 과거에 대한 독일인들의 처절한 자기 반성이 녹아있다.
2005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 수상작인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은 1980년대 숄 남매의 동생 잉에 숄의 수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으로 국내에도 알려진 뮌헨대 반나치 저항 조직 ‘백장미단’의 투쟁을 담은 작품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들의 ‘영웅적 투쟁’을 그리는 대신, 백장미단의 유일한 여성 단원이었던 소피 숄의 스물 두 해 짧은 생애의 마지막 닷새를 담담히 기록하면서 인간의 올곧은 양심의 힘을 묵직하게 보여준다.
1943년 2월18일, 숄 남매는 대학에 반나치 유인물을 뿌리다 현장에서 체포된다. 게슈타포의 취조를 거쳐 22일 재판에 회부된 남매는 나치 치하에서 6,000여명을 죽음으로 내몬 ‘피의 판사’ 롤란드 프라이슬러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고, 바로 그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다.
마크 로드문트 감독이 발굴한 미공개 수사기록과 당시 소피를 담당한 모어 수사관의 유족 증언 등을 토대로 생생하게 재연한 심문 과정에 흔히 생각하는 신체적 고문이나 악랄한 회유 공작은 없다. 감독은 대신 “정치에는 관심 없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던 소피가 망설임 끝에 죽음을 택하기까지 겪는 심리적 변화를 밀도 있게 담아낸다. 이 작품으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줄리아 옌치는 생에 대한 집착과 양심의 소리, 두려움과 용기의 불협화음을 이겨낸 소피의 최후를 오롯이 되살리며, 여전히 불의와 거짓, 모순이 가득한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당신이라면 어느 자리에 설 것인가”를 묻는다. 원제 ‘Sophie Scholl-Die letzten Tage’. 22일 개봉, 15세.
이희정기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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