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1592~1598)에 대한 한국 중국 일본 3국의 ‘공적인 집단 기억’, 즉 공식 역사는 철저히 자국 중심적이다. 우리에게 임란은 ‘왜놈들의 난리’이고, 일본에게는 정벌이며, 중국으로서는 제후국에 은혜를 베풀어 중화질서 외부의 적을 물리친 ‘항왜원조’(抗倭援朝)가 된다.
임란을 민족주의, 일국사(一國史) 중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확장된 공간과 ‘집단 기억’이라는 통시대적 관점에서 조망하는 ‘조일 전쟁에서 동아시아 3국 전쟁으로’ 국제학술대회(서강대 국제한국학센터ㆍ한산대첩기념사업회 공동주최)가 19일부터 4일간 경남 통영시에서 열린다. 학술대회는 6개국 40여명의 학자가 참가, 임란을 통해 무엇을 기억하려 했고(임란의 기억과 국민 만들기), 무엇을 잊으려 했으며(기억과 망각 속의 임란), 조선과 명의 내부와 역학 관계(전쟁과 평화) 및 일본 여진 등 국제환경(중심과 종속)은 어떠했는지 등을 논의해본다.
미리 배포된 발표 논문 중에는 지금까지 상식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집단 기억을 무너뜨리는 내용이 적지 않다.
박환무 서강대 강사는 1892년 일본 육군 대위 시바야마 나오노리가 장교단체 기관지 ‘가이코샤’에 투고한 ‘문록정한수사시말 조선이순신전’(文祿征韓水師始末朝鮮李舜臣傳)을 발굴, “망각의 늪에서 이순신을 끌어내‘민족의 수호자’ ‘구국의 영웅’ ‘동양의 넬슨’으로 만든 것은 일본이었다”고 주장한다. 시바야마의 이순신전이 군인의 사표로서 일본 해군의 정신교재로 읽히고, 한일합방 이후 부패와 대립하는 상징으로서의 의미가 부여되면서 이순신은 ‘성웅’으로 탄생(이윤재 ‘성웅 이순신’ㆍ1931)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의병의 신화도 깨진다. 태동고전연구소 하영휘 박사는 임란 당시 경남 화왕산성 방어전을 기록한‘창의록’(倡義錄ㆍ1734)을 분석, 의병 항쟁이 정치적 목적에 의해 부풀려지고, 거듭 인용되는 과정에서 진실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1734년 영조가 노론계인 조 헌의 ‘칠백의총’에 제문을 내리자, 영남 남인계 유생들이 노론에 대항하기 위해 꼭 1명 더 많은‘701명’의 항쟁 역사를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허남린 브리티시콜롬비아대 교수도 “의병은 사족(士族)들이 양민마저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에서 자기 방어와 생존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명기 명지대 교수는 조선이 명에 대해 사용했던‘나라를 다시 만든 은혜’(再造之恩)란 말도 선조의 정치적 입지와 연결지어 해석했다. 즉, 임란을 거치며 신하와 백성들로부터 신망을 잃은 선조가 명을 국란 극복의 주체로 조작함으로써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잃지 않으려 했다는 것이다. 요네타니 히토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1599년에서 1643년까지 63차례에 걸쳐 6,000여명의 조선인 포로가 송환됐으며, 이들은 귀환후‘포로가 된 죄’로 냉대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정두희 서강대 국제지역문화원장은 “임란은 국제전이었지만 3국 역사는 오직 자국의 영광만 드러내고 있다”며 3국간 뿌리깊은 대립 의식과 민족주의 정서의 재흥 징후가 보이는 상황에서 임란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집단 기억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안준현 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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