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멀리 왔구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음악이 처음 만들어지던 그 순간, 그때 그 반짝이던 창작의 시간에서 왜 이렇게 멀리 떨어졌을까, 요즘 그런 생각이 부쩍 드네요.”
데뷔 30주년을 맞는 소회를 묻자 그는 나지막하고도 쓸쓸한 목소리로 애상을 얘기했다. 소탈하고 헐렁헐렁해 보이는 TV 드라마에서와 달리 예민하고 사색적인 실제 모습이 그가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밴드 중 하나의 수장이었다는 사실을 대번에 환기시켰다.
한국 모던 록의 효시, 산울림. 1970년대에 서태지 이상의 충격을 몰고 등장해 한 시대를 쩌렁쩌렁 울렸던 ‘형제밴드’ 산울림이 다음달 5, 6일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를 갖는다. 김창완(52ㆍ리더) 창훈(50ㆍ기타) 창익(48ㆍ드럼) 3형제 중 두 동생은 미국과 캐나다에서 직장인과 사업가로 살고 있고, 큰 형만 한국에서 연기자로, DJ로, 가수로 ‘전직’을 잇고 있다. 1년에 한두 차례 형제상봉을 겸한 공연을 열고 있지만, 올해는 감회가 남다르다.
김창완이 17살, 김창훈이 15살이던 1971년 처음 곡을 쓰기 시작한 이들 형제는 따로 음악을 배운 적도, 작곡가가 되겠다는 특별한 의식도 없이 1977년 ‘아니 벌써’로 ‘얼떨결’에 데뷔했다. “음악은 학교 음악시간에 배운 게 다예요. 저희 형제가 청음이나 독보력은 타고 났어요. 어머니께서 우리가 음악 하는 것에 걱정도, 관심도 전혀 보이지 않으셨는데, 그게 가장 좋은 음악교육이었던 것 같아요.”
총 13장의 정규앨범을 통해 ‘회상’ ‘너의 의미’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창문 너머 옛사랑이’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산울림은 9집을 최고 역작으로 꼽는다. “우리 형제가 정말 치열하게 싸우는 편이었어요. 둘째가 가사나 음악적 테크닉 등에서 서정성이 강한 반면 저는 실험적이죠. 막내는 중재자였고. 그런 갈등의 산고 끝에 나온 게 9집인데, 유럽에서도 가장 호평을 받았죠. 그나마 제가 큰 형이라 편했어요. ‘이 자식들, 말 들어’하면 됐거든요.(웃음)”
산울림이 최고의 록밴드였다지만, 그 말이 곧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밴드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가사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과장되지 않은 일상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하려 했어요. 뭔가 가공되고 조작된 느낌을 주는 기존 가요에 대한 저항이 있었거든요.” 아무나 쓰고 아무나 부를 수 있을 것 같은 게 산울림의 매력이지만, 산울림의 곡을 쓰고 부른 사람들은 산울림밖에 없다는 데 산울림의 위대함이 있다.
산울림의 마지막 앨범은 1997년 내놓은 13집. “음악적 창작력이라는 것은 확실히 정점이 있어요. 그 이후로는 자기 표절이나 명성에 안주하기 쉽죠. 그렇지만 그런 창작자로서의 쇠잔함과 무기력에 대한 진실한 고백마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스러지는 것은 불가항력적이죠. 하지만 거기서 오는 애상, 그것도 아주 소중하면서도 예술적으로 가치 있는 그런 감정이에요. 12집을 만들 때 그 감정과 처음 맞닥뜨렸는데, 당혹스럽기도 하고…. ‘불안한 행복’과 ‘백일홍’이 그런 감정을 담은 노랩니다.”
산울림은 새 앨범을 낼 계획이 없다. 새 노래들은 1년에 한 번씩 여는 공연에서 소개하면 되고, 그 곡들이 널리 알려지면 굳이 앨범을 내지 않아도 진행형의 산울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연주를 하다 보면 피붙이가 아니고는 소통하기 어려운 채널이 있어요. 찡~한 게, 참 희한해요. 음악적 역량이요? 그건 맏이가 최고죠. 다른 것도 다 맏이가 최고….” 7월5~6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02)522-9933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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