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정오. 서울 중구 필동 ‘한국의 집’ 안마당에 고운 한복 차림의 손님들이 ‘종가(宗家) 며느리 간담회’ 현수막 아래 둘러 앉았다.
전국 39개 유명 종가에서 온 맏며느리와 둘째 며느리 등 60여명이 문화재청 주최로 처음으로 한 데 모인 자리. 수백년 전부터 내려오는 종가의 독특한 관혼상제와 음식ㆍ생활문화이 몸에 배어 있는 이들은 자주 ‘전통 문화의 계승자’로 칭송된다. 하지만 정말 그것 뿐일까?
종가 며느리들은 고택(古宅)을 지키며 살아가는 고충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격식 있고 고풍스런 얘기만 기대한 건 실수였다. 당연하지만, 시대가 변했다는 건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급속하게 변화하는 세태 속에서도 우리의 전통과 문화 유산을 지켜오고 있는 분들의 노고에 감사를 드리기 위해 이번 자리를 마련했다”고 인사를 건넸지만 이후 쏟아진 질타에 곧 머쓱해지고 말았다.
종가 며느리들의 고충은 이들이 살고 있는 고택이 문화재라는 점에서 출발했다. 고산 윤선도 종가의 한경난(68) 차종(次宗)부인은 “윤선도 유적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유물전시관을 지어놓은 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다”며 문화재 지정만 할 뿐 관리에는 손 놓고 있는 당국을 성토했다.
선산 유씨 문절공 유희춘 종가의 노혜남(77) 종부인은 “나이 들어 내 몸 하나 가누기 힘든데 너른 마당에 잡초 하나라도 나 있으면 종택을 찾는 손님들에게 죄 짓는 기분이 든다”며 “실질적인 도움을 줘서 문화재가 관리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화재 지정에 따른 실생활과의 괴리도 여기 저기서 쏟아졌다. 오리 이원익 종가의 황금자(67) 종부인은 “기왓장 한 장을 교체하려는데 어렵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제 때 보수를 할 수 없다”며 “사진 촬영에서부터 개ㆍ보수 신청서 작성, 공사 허가까지 받는 데 1년도 더 걸린다”고 말했다. 대구서 온 경주 최씨 백불암 최흥원 종가의 최진돈(55) 종손은 “사유권 운운은 하지 않을 테니, 문화재로 지정했다면 차라리 관리권까지 가져가서 관리해 달라”고 유 청장에게 호소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종손은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한 폭의 동양화와 같은 경치의 고택에서 사는 현대귀족으로 생각하는데 차라리 종택 관리사무소 직원이나 마찬가지”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유 청장은 “상당수 종가가 국가가 아닌 지방자치단체가 지정한 지방문화재라서 문화재청이 지원하기 힘들다”고 해명했다. 그는 또 “관련 법안 통과로 내년 3월부터 기동성을 갖춘 ‘문화재관리보수단’이 활동을 하게 됐다. 앞으로는 이 보수단이 현장에 투입돼 적절히 조치할 것이고, 종택의 원형을 변형시키지 않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 중”이라고 설명했다.
뜻하지 않게 청문회장으로 변해버린 간담회였지만 종가 며느리들은 여유를 잃지는 않았다. 한 종부인은 “불천위 제사(신주를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보관하며 올리는 제사)를 지내면서 겪은 이야기가 이 곳에 온 사람들과는 통하더라”고 반가워했다.
그는 “밖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간 ‘조선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드라마 얘기를 하고 있느냐’는 등의 놀림을 당했을 것”이라고 웃었다.
정민승 기자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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