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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5> 리오넬 테레이(1921-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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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산의 산 그리고 사람] <15> 리오넬 테레이(1921-1965)

입력
2006.06.08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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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가는 사람들을 비난할 때 흔히들 하는 말이 있다. 아니 도대체 산에 올라가면 돈이 나와 쌀이 나와? 거기 뭐가 있길래 그렇게 목숨까지 내걸고 못 올라가서 안달들이야? 대체로 아내 혹은 애인들이 내뱉는 볼멘 투정들이다. 문제는 이들의 말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산에 오르는 일은 ‘쓸 데 없는 짓’이다. 다시 말해 산악인이란 ‘쓸 데 없는 것을 정복하려는 사람(프랑스어로 les conquerants de l'inutile)’을 뜻한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비난하는 이들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꿇어앉아 사죄해야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오히려 보란듯이 그런 제목의 책을 자랑스럽게 써놓고는 훌쩍 저 세상으로 건너가 버린 사람이 있다. 바로 ‘무상(無償)의 정복자’라는 저서로 널리 알려진 프랑스의 산악인 리오넬 테레이(1921-1965)다.

때로는 원문보다 역문이 권위를 가질 때가 있다. 나는 ‘무상’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원문이 ‘inutile'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배를 잡고 웃었다. 영어로는 'useless'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서 ‘쓸모가 없다’는 뜻인 것이다. 사실 세상의 상식적 기준, 특히 자본주의적 기준에서 바라볼 때 등산은 참으로 쓸 데 없는 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을 오직 대가 혹은 보상의 차원에서만 평가해야 된다면 우리의 삶이 너무 비루하고 초라해지지 않겠는가. 리오넬 테레이는 말한다. “등산은 자기 과시가 아니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인간의 의식과 행동이며, 자연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가혹하며 신중한 도전이다.” 만약 돈이나 쌀 같은 어떤 대가를 염두에 두고 등산을 논한다면 그 논점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등산이란 ‘무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독창적인 인간활동이기 때문이다.

리오넬 테레이는 알프스의 유명한 스키 휴양지 그르노블 근교의 베르동 계곡에서 태어났다. 멋진 대암벽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 ‘프랑스의 요세미테’라고 불리는 곳이다.

그의 부친은 프랑스에 텔레마크 산악스키를 도입한 장본인이었고 열기구 타기와 카레이싱을 즐기는 모험가였다. 샤모니 가이드조합에서 정식으로 등산교육을 받았을 만큼 산을 좋아했던 그의 모친 역시 일찌감치 테레이에게 암벽등반을 가르쳤다. 테레이가 소년시절부터 스키와 등산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부모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그는 중학교 시절부터 각종 스키대회를 휩쓸다가 19세가 되던 해에는 프랑스 국가대표 스키선수로 발탁되기도 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테레이는 처음부터 권위와 억압을 못 견뎌했다. 처음 입학했던 기독교계 신학교에서는 교실 천장에 권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퇴학조치를 당했다. 이후 자원입대한 군대에서는 암벽등반을 즐기다가 본의 아니게 탈영을 한 꼴이 되어 혹독한 처벌을 받기도 했다.

당시 그와 함께 인공등반 기술을 익히는 데 여념이 없었던 또 다른 군인이 바로 가스통 레뷔파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빼어난 청년산악인으로서의 그의 자질은 엉뚱한 곳에서 빛을 발한다. 레지스탕스 활동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스테판중대에 배속되어 독일군 물자수송루트를 교란시키는 산악전투활동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곧 그의 시대가 왔다. 그는 1945년 9월부터 군대에서 허락을 얻어 5개월 간의 혹독한 수련과정을 거친 후 정식으로 샤모니 가이드 자격을 획득한다. 이후 그는 또다른 가이드 루이 라슈날과 함께 ‘환상의 콤비’를 이루어 서부 알프스의 거벽과 침봉들을 차례로 섭렵해나간다.

이 시기에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것이 1946년의 그랑드 조라스 워커스퍼 제4등, 1947년 아이거북벽 제2등의 기록이다. 유럽 산악계는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알피니즘을 주도해나가는 국가들의 우선순위가 바뀐다. 2차대전 이전에는 독일과 이탈리아의 선두 다툼이 치열했다면, 2차대전 이후에는 프랑스가 그 선두로 치고 나가게 된 것인데, 이때의 대표선수가 바로 리오넬 테레이였다.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테레이의 활동반경은 지구 전역을 커버하게 된다. 인류 최초로 8,000m급 산의 정상에 오른 것이 1950년의 프랑스 안나푸르나원정대였는데, 리오넬 테레이는 가스통 레뷔파, 루이 라슈날과 더불어 이 원정대를 이끈 3대 프랑스 가이드였다. 1952년에는 남미의 파타고니아로 건너가 피츠로이의 정상에 섰다.

초속 55m의 강풍이 몰아치는 750m의 거벽에 매달려 하루 종일을 싸워야 고작 170m를 오를 수 있는 끔찍한 등반이었다. 이후 1954년에는 세계 제5위봉인 마칼루(8,463m), 1962년에는 세 차례의 도전 끝에 자누(7,710m), 1964년에는 알래스카의 헌팅턴(3,731m)을 초등하며 기염을 토했다.

테레이의 최후는 뜻밖에도 허무하다. 1964년의 헌팅턴 원정에서 거의 죽다 살아난 그는 아내에게 “다시는 위험한 산행을 하지 않겠다”고 굳은 맹세를 했다. 그에게 불의의 일격을 가한 것은 고향 근처의 낮은 산 주르베였다. 비록 해발고도는 낮았지만 6급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암벽이 있는 곳이다.

테레이는 이 산의 바위에 붙어 암벽등반을 하던 도중 안개 속에서 추락하여 사망했다. 조난 소식을 듣고 급파된 샤모니의 가이드들은 당대 최고의 산악인이 이처럼 허무하게 죽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아 모두들 망연자실한 채로 시신을 수습했다고 한다. 향년 44세. 평생토록 ‘무상(無償)의 가치’를 추구해온 테레이의 삶 자체도 무상(無常)함에서 비껴갈 수는 없었나 보다.

"인간은 대지에 매인 벌레 아닌 알프스의 새다"

산악인 교과서 된 '무상의 정복자'

가스통 레뷔파가 상업적으로 성공한 가이드로 유명하다면, 리오넬 테레이는 고객의 안전을 최우선시하여 신뢰를 드높인 가이드로 유명하다. 1950년의 안나푸르나 초등 당시에도 테레이의 이러한 성품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자신이 공격조로 나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인 루이 라슈날에게 그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초등에 성공한 루이 라슈날과 모리스 에르족은 동상과 설맹으로 조난상태에 빠졌다.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들을 구조하여 생환의 길로 들어서게 한 장본인도 바로 리오넬 테레이다.

국가대표 스키선수 출신인 리오넬 테레이는 고객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가이드들에게도 직접 산악스키를 가르쳤다. 그의 부친이 프랑스에 산악스키를 도입한 장본인이니 가업을 충실히 계승한 셈이다. 젊은 시절 프랑스 스키선수권 대회에 출전해 종합2위로 입상한 바 있는 그는 특히 다이내믹한 ‘텔레마크 턴’으로 유명하다. 발군의 스키실력에 덧붙여 최고의 등반 솜씨까지 갖추었으니 ‘산악스키의 명교관’이라는 칭송을 듣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의 저서 ‘무상의 정복자’는 전 세계 산악인들에게 일종의 교과서처럼 읽혀진다. 판에 박힌 일상과 인간의 조건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그의 힘찬 몸짓은 이카루스의 날개짓을 연상시킨다. “우리가 암벽에서 얻는 즐거움은 어려운 일을 성취했다는 기쁨과 수직으로 상승한다는 느낌이다. 그 순간 인간은 자신이 마치 창공을 날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인간은 결코 대지에 매여 있는 벌레가 아니라 알프스의 영양이 된다. 아니 새가 되는 것이다.”

산악문학작가 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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