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산불'의 무대는 소백산맥 속 과부마을이다. 낮에는 대한민국이지만, 밤에는 공비가 출몰하는 곳이다. 점례의 집에 부상한 공비 규복이 잠입한다. 교사였던 그는 입산을 했으나 허구성을 견딜 수 없어 탈출한 것이다. 그를 사랑하게 된 점례는 대밭에 숨겨 주며 완쾌되면 자수하라고 말한다. 그들 사이에 다른 과부 사월이 끼어든다.
사월은 임신을 하고, 점례는 두 사람에게 떠나라고 권한다. 그러나 먼저 국군의 토벌작전이 시작된다. 대밭이 불길에 싸인 가운데 두 번의 총소리가 난다. 마을 사람들 앞으로 점례가 나타난다. 죽은 두 사람에 대한 속죄를 위해 고행의 길을 걷겠다며, 삭발한 머리로 마을을 떠난다.
▦ 차범석씨가 6일 타계했다. 1962년 발표된 '산불'은 한국 사실주의 희곡의 정수를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이다. '산불'은 지금도 위력을 잃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해에도 공연되었고, 내년에는 세계적 극작가 아리엘 도르프만의 각색을 거쳐 '댄싱 섀도우'라는 뮤지컬로 다시 태어난다. 차범석씨는 "걸어서 못 가면 휠체어를 타고라도 꼭 보겠다"며 뮤지컬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니 더욱 애석하다.
▦ 차범석씨의 사실주의 연극은 멀리 유치진 이해랑의 연극사적 정통성에 닿아 있다. 역사의 격동 속에 팽개쳐진 나약한 인간의 실존과 고뇌가 그를 리얼리즘 연극인으로 키워간 듯하다.
그가 비공식 데뷔작이라고 불렀던 '별은 밤마다'에서는 이미 '산불'과 유사한 얼개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전쟁 중인 51년 고향 목포에서 학생연극운동으로 막을 올린 연극이다. 이 연극은 이념과 빨치산 활동에 참가한 지식인의 고뇌, 가정의 비극 등 묵직한 실존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 그가 많은 상을 받은 것은 여러 예술적 업적 덕분이지만, 많은 단체장을 역임한 것은 부드러우면서도 원칙주의자였던 까닭일 것이다. 그의 생활철학은 소박했다. 그러나 범인(凡人)에게는 그 원칙주의가 유별나 보이기도 한다. 그는 '빚 없는 인생'을 좌우명 삼았고, 자가용차ㆍ신용카드ㆍ휴대전화가 없는 삼무(三無)주의를 고집했다.
한국 연극의 토대를 쌓고 이끌어온 그는 연극인으로서 행복하고도 완벽에 가까운 생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더라도 소중한 인물을 잃는 슬픔은 덜어지지 않는다.
박래부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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