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거리응원이 상업주의의 포로가 돼버렸다.
2006 독일 월드컵대표팀의 마지막 평가전(가나전)이 열린 4일 밤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4년 전처럼 붉은 물결이 넘실댔지만 ‘상업적으로 기획된 신바람’만 가득했다. 서울광장 거리응원 주관사 광고모델로 도배가 된 빌딩, 쉴새 없이 귀를 찌르는 윤도현 밴드의 애국가 등에 ‘눈살’ ‘귓살’을 찌푸린 사람이 많았다.
회사원 김종은(32)씨는 “응원을 한 게 아니라 기업과 방송의 홍보전에 동원된 느낌이라 다시는 돈 냄새 나는 거리응원엔 나오지 않겠다”며 불쾌해 했다. 회사원 윤진현(33)씨도 “차라리 이번 월드컵 거리응원이 흥행에 실패해 두 번 다시 기업이 자발적인 응원 열정에 찬물을 끼얹지 못하게 됐으면 좋겠다”고 일갈했다.
사람들은 2002 월드컵의 순수하고 자발적인 열정이 그립다고 했다. 의사 정기백(34)씨는 “4년 전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몇 천원짜리 ‘be the reds’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로 나와 하나가 됐다. 그런데 지금은 이 업체, 저 업체 응원 따져가며 분열되는 느낌”이라고 씁쓸해 했다. 디자이너 박영미(26ㆍ여)씨는 “응원이 아니라 관전으로 변질돼 마치 전체주의 행사를 보는 것 같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상암 서울월드컵경기장의 응원전도 방송사와 한 기업이 주도하는 대형 쇼로 변질됐다. 이름까지 아예 ‘2006 독일월드컵 응원쇼’였다. 방송사는 경기장이 꽉 차 보이도록 좌석을 바꿀 것, 카드섹션을 20초 이상 할 것, 뉴스화면에 나갈 때 함성을 지를 것 등 시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줄 것을 주문했다.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자동차 냉장고 노트북 등 경품도 내걸었다.
이를 보는 시선이 고울 리 없다. 대학생 최광언(22)씨는 “서울광장의 응원 형태가 마음에 들지 않아 상암에서 친구들과 신명 나게 사물놀이를 하려고 장비까지 챙겨왔는데 주최 측이 6시간이나 기다리게 했다”며 “응원도 맘대로 못하냐. 차라리 길거리에서 따로 응원하겠다”고 따졌다.
신나게 응원하러 왔다가 졸지에 동원된 관객이 된 시민들은 방송사가 마련한 쟁쟁한 인기가수와 화려한 폭죽도 짜증스럽기만 했다. 경기 광주시에서 왔다는 한 주부는 “아이들과 왔는데 콘서트인지 응원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다. 10대들은 인기가수의 공연이 끝나기 무섭게 “볼 것 다 봤다”며 우르르 응원장을 빠져나갔다.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한 듯 한 기업과 월드컵 거리 응원을 준비하고 있는 붉은 악마는 5일 홈페이지(reddevil.or.kr)를 통해 “현재 진행 중인 후원계약이 종료되면 앞으로 기업체를 비롯한 어떤 집단의 금전적 후원도 받지 않고 수익사업 역시 금지토록 하겠다”는 ‘신 붉은 악마 선언’을 발표했다.
전문가들도 월드컵의 상업성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성공회대 정해구(사회학과) 교수는 “독일 월드컵은 거리 응원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 시켜주기보다 오히려 상업적 오염으로 또 하나의 스트레스를 제공해줄 것 같다”고 지적했다. 또 서울디지털대 최윤재(문창학부) 교수는 “영리추구 기업이 거리응원의 주최자가 돼 4년 전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빚어낸 자긍심과 자존심을 훼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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