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인류 출현기부터 유전자 속에 각인된 본능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공격을 가하거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면 몸 속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구친다.
전투상황에 인체를 준비시키기 위한 본능적 반응이다. 피속으로 뿜어져 나간 아드레날린은 교감신경을 흥분시켜 심장 박동이 빨라지게 하고 모세혈관 수축으로 혈압이 상승한다. 아드레날린은 근육 내에 저장된 글리코겐의 분해를 촉진하는 호르몬의 작용을 돕기도 한다. 전투에서 잘 싸울 수 있도록 근육을 준비시키는 과정이다.
▦ 축구는 전쟁이라는 말이 완곡한 비유만은 아니다.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들이나 관전자들은 적어도 신경생리학적으로는 완벽히 전쟁 상황과 똑 같은 상태가 된다. 선수들은 물론 관중의 몸 속에서도 아드레날린이 분수처럼 솟구쳐 피속으로 퍼져 나간다. 때때로 경기장 안팎에서 벌어지는 폭력사태는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이다.
1969년 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세 차례의 축구경기가 끝난 뒤 탱크와 폭격기를 동원해 실제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선진 문명권이라는 유럽에서도 축구 경기장 주변의 난동은 드문 일이 아니다.
▦ 3000년 전 고대 멕시코에서는 축구가 태양신에 드리는 제사의 한 형식이었다고 한다. 부족 간 전쟁을 치르고 난 뒤 왕족과 귀족 포로끼리 축구 경기를 시켜 진 팀을 제물로 바쳤다. 진 팀의 주장을 참수해서 두개골을 트로피처럼 진열해놓는 풍습이 600년 전까지도 계속됐다니 축구경기는 문자 그대로 목숨을 건 전쟁이었던 셈이다.
칼 세이건은 현대인의 스포츠 열광을 수 만년 전 수렵ㆍ채취 시기부터 형성된 전쟁과 사냥 욕구의 대리 충족으로 보았다. 인간의 생활방식은 달라졌지만 유전자가 바뀔 만큼 시간이 흐르지 않아 인간은 스포츠 경쟁을 통해 전쟁과 사냥 욕구를 충족한다는 것이다.
▦ 월드컵 대회를 앞두고 온통 축구 얘기다. 일부에서는 월드컵을 통해 나타날 지구촌의 과도한 민족주의를 우려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도 2002년 6월 월드컵 4강 신화의 열광에 동참하면서도 대책 없는 민족주의가 아니냐는 찜찜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스포츠가 어차피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본능적 욕구 충족이라면 굳이 찜찜해야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평소 일상 생활 속에서 지나친 아드레날린 반응으로 주변을 피곤케 할 것이 아니라 월드컵 경기를 통해 안전하게 아드레날린의 쾌감을 마음껏 누려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이계성 논설위원 wk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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