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우리 몸 어딘가에는 지금도, 과거의 몸들이 지녔던, 우주와의 교신용 안테나가 남아있을까. 그래서 무슨 별들이 어떻게 서면 “흙들이 마구 부풀어 오르는 날”임을 알아 파종하고, 구름의 신음소리에 사지가 감응해 “빛나는 통증으로 하늘과 이어”질 수 있을까. 과연 그런 ‘구름의 가계’는 아직 멸문(滅門)하지 않고 남아 가녀린 그 혈통을 이어가고 있을까. “별이 지상에 내리는 걸 저어하지 않도록/ 일찌감치 저녁상을 물리고/ 잠자리에 드는 마을”(‘별빛보호지구’)들은 자본의 빛에 쫓겨 하릴없이 사라지는 중인데.
손택수(36)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목련전차’(창비 발행)에는, 이미 낯설어진 ‘오래된 미래’의 풍경들이 시종 없이 등장한다. 문풍지 도배, 제비 부부 신접살림, 메주 곰팡이, 아기 업고 밭 매는 등 굽은 아낙…. 물론 그것들은, 책갈피 속 지난 계절의 꽃잎처럼, 이 젊은 시인의 기억 어느 대목에서 불거진 것들이다. 그는 그 ‘빛나는 통증’으로, 그 통증에 대해, 통증을 위해, 시를 썼다. 그것에 대한 그리움도 아쉬움도 깨달음도 아닌, 그냥 그대로의 통증들. 그럼으로써 우리를 아프게, 그립게, 아쉽게 하는 통증들이다.
그는 농사꾼 할아버지의 지겟작대기 가르침을 ‘최초의 받아쓰기’로 기억한다. “지겟작대기 끝에서 나온 자음(ㄱ)”의 자리에서 “씨앗 꽉 문 고추와/ 입천장 데며 먹던 고구마 노란 속살이 태어났”고, 할아버지는 그 자음처럼 “허리가 펴지지 않은 채 땅에 묻히셨다/ 기름진 자음이 되셨다.” (‘자음’) 할머니도 농사꾼이었다.
“별이 달을 뽀짝 따라가는 걸 보면은 내일은 눈이 올랑갑다 꼭 이런 날 늬 할아비가 오셨구나”하시던 할머니도 “한마을 한집에서 일흔 해를 살고 한몸에 여든일곱 해를 머물”(‘가새각시 이야기’)다 가셨다. 구름의 가계, 시인의 가계다. 시인은 “지구상의 모든 흙은 한번쯤 지렁이의 몸을 통과했다”던 다윈의 말처럼, 시인은 자신이 흙의 가계임을 잊지 않고있다.(‘내 목구멍 속에 걸린 영산강’)
그런 그가 올해로 등단 9년차 시인이다. 단풍나무 보고 얼굴 붉히는 시인. “…열어놓은 베란다 창문을 넘어/ 아파트 화단 아래 떨어진/ 아내의 속옷,/ 나뭇가지에 척 걸쳐져 속옷 한 벌 사준 적 없는/ 속없는 지아비를 빤히 올려다보는 빤스(…) 첫날밤처럼 구멍 난 단풍나무 빤스를 벗기며 내내/ 볼이 화끈거렸다// 그 이후부터다, 단풍나무만 보면/ 단풍보다 내 볼이 더 바알개지는 것은”(‘단풍나무 빤스’)
그가 염소를 보고 “쇠방울을 수족처럼 매달고 평생을 단조로운 소리 하나에 목졸려 살아온 염소들. 내팽개치면 내팽개치려 할수록 요란하게 치떠는 소리, 그 소리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데 한 생”을 보내고, “제 안에서 올라오는 신트림 같은 외로움”(‘염소 일가’)이 ‘빛나는 통증’이 아님은 자명하다.
시인에게 아버지가 그랬다고 한다. “시란 쓸모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기왕 시작했으니 최선을 다해보라”고. 시인은 “쓸모없는 짓에 최선을 다하는 것, 이게 나의 슬픔이고 나를 버티게 한 힘”이라고 했다.(‘시인의 말’) 그 ‘쓸모없는 짓’이 이번 시집의 그에게는 ‘빛나는 고통’을 환기하는 일, 우주와 교신하는 안테나를 복구하는 일일 것이다. 목련의 화신이 내달리듯, “생명의 레일을 따라/ 바퀴를 굴리는 힘을 만나”(‘목련 전차’)는 길을 닦는 일일 것이다. 그는 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최윤필 기자 walde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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