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성 선수가 뛰고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은 잉글랜드 인들이 역사상 가장 인상적인 공격수이자 빛나는 골잡이로 존경하는 보비 찰튼이 활약한 전통의 팀이다. 찰튼은 만 17세이던 1954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의 프로 축구선수로 데뷔했다. 찰튼은 빠른 몸놀림과 강력한 왼발의 명수로 대포알 같은 슛을 쏘아대는 공격수이지만 패스 또한 정교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 팀 수비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선수로 자라났다. 1958년에는 잉글랜드의 국가대표선수로 뽑히면서 공격을 주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렇게 멋진 플레이로 잉글랜드 축구팬의 마음을 빼앗은 찰튼에게도 생사의 기로에 놓인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1958년 2월 6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팀은 유럽 컵 준결승전에서 만난 유고슬라비아 팀과 경기를 하기 위해 벨그라드로 원정을 떠났다. 팀은 게임이 끝나자마자 귀국하기로 했다. 그런데 귀국 길에 비행기 이륙시간을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지연시킨 사건이 발생했다. 한 선수가 여권을 잃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독일의 뮌헨공항에서 재급유를 받기로 비행 스케줄을 변경해야만 했다. 그러나 재급유를 끝낸 비행기의 엔진에 문제가 발생하여 비행기가 두 번이나 이륙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새벽 3시 4분에 세 번째 이륙을 시도하다, 비행기는 비행장을 둘러싼 펜스 옆에 있는 한 가정집으로 돌진했다. 이 사고로 임원 3명, 선수 8명, 기자 8명이 목숨을 잃었다. 선수 두 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선수 생활을 포기해야 했다.
이 처참한 사고 속에서 찰튼은 부상도 당하지 않고 살아났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시즌의 잔여 경기를 찰튼을 중심으로 젊은 선수를 보강한 팀으로 치러야 했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찰튼은 게임에 임할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로 사망한 동료들의 넋을 위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또 영혼들이 팀을 보살피고 있다고 여겼다. 그 덕인지 팀은 사고 발생 후 셰필드 웬즈데이를 상대로 벌인 첫 경기에서 3 대 1 로 승리했다. 팀이 승리하는 순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팬들은 모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 뒤 찰튼은 1966년 영국 월드컵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기나긴 축구 인생이 가장 화려한 꽃을 피운 순간이었다. 이 때도 찰튼은 동료 영혼들의 도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음으로 양으로 대스타 찰튼의 후광을 받고 있는 팀이다. 이 팀의 미드필더로 공격을 주도하는 박지성 선수도 예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박지성 선수가 발목 부상으로 노르웨이와의 평가전에서 뛰지 못했다는 소식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영령들의 가호가 박 선수에게 미치기를 기대해 본다. 내친 김에 40년 전 월드컵 대회에서 찰튼을 도와주었던 것처럼, 박 선수가 본선 무대에서 신들린 기량을 보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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