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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신기자클럽 창립 50주년 기념/ "신미양요 때도 외신기자는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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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외신기자클럽 창립 50주년 기념/ "신미양요 때도 외신기자는 지켜봤다"

입력
2006.06.01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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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왼편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데 쪽으로 휘청휘청 걸었다. 심장은 방망이질을 하고 몸은 덜덜 떨렸다.…육영수 여사가 의자에서 쓰러지기 시작하는 걸 올려 봤다.”1974년 8월15일 국립극장에서 육 여사 피격 장면을 본 리처드 할로란 뉴욕타임스 특파원은 ‘악몽이 현실이 됐다’며 아직도 몸서리친다.

서울외신기자클럽(SFCC)이 창립 50주년(2일)을 맞아 31일 펴낸 ‘한국의 목격자’(Korea Witnessㆍ은행나무 발행ㆍ영문)는 1871년 신미양요 때부터 135년간 전쟁과 위기, 좌절과 극복의 한국 역사를 함께 한 외국 특파원의 역사와 회고담을 모은 책이다. 모두 60여명의 전ㆍ현직 외국 특파원의 글을 돈 커크 전 시카고트리뷴, 최상훈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 서울특파원이 엮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특파원들의 우리에 대한 시각은 제국주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한국전쟁 때까지 전쟁이 아니면 한국을 거의 찾지도 않았다.

한국에 발을 디딘 첫 외국 특파원인 이탈리아인 펠리스 베아토도 미군 종군 기자였다. 미 해병대는 1871년 강화도 광성보(堡)로 밀려들었는데, 조선 수비군은 몇 명의 중상자를 제외하곤 전원 순국했다. 베아토의 ‘미 해병과 조선군 시체’ 사진은 서구 신문과 잡지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러일전쟁(1904~05년) 때는 ‘황야의 부름’ ‘강철 군화’ 등의 작가 잭 런던, 최초의 한국 상주특파원으로 ‘배설’이란 우리 이름을 지은 어네스트 토머스 베델 등 특파원들이 대거 몰려왔다. 한국전쟁 때는 외국 특파원이 23명이나 숨졌다. “당장 도쿄로 튀어와. 북한이 방금 남한을 침공했다구.” 미 INS통신, NBC방송 종군기자였던 존 리치는 1950년 6월25일 새벽 도쿄지국장의 다급한 전화를 지금까지 생생하게 기억한다.

독재정권이 이어지던 80년대 중반까지는 외국 특파원들도 입국 거부, 추방, 지국 폐쇄, 기사 개입 등 우리 언론처럼 굴곡을 겪었다. 특히 한국계 기자들은 중앙정보부 분실에 끌려가 신체적 위협까지 당했다. AP통신 기자였던 황경춘씨가 기억하는 정보 당국자의 말. “기자이기 이전에 조국에 충성해야 한다. 한국에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해.”

전 워싱턴포스트 특파원 돈 오버도퍼는 72년 남북적십자 회담을 둘러싼 기억들을, 전 볼티모어선 특파원 브래들리 마틴은 79년 10ㆍ26사태에 대해, 독일 공영방송ARD 카메라기자였던 유르겐 힌츠페터는 목숨 걸고 전했던 1980년 광주의 현장을 더듬었다.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은 한국의 언론자유를 얘기하면서 “산케이신문이 우익이라고 하는데 ‘우린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이고 당신들(한국인)이 왼쪽으로 간 것이다’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며 북한 정보에 대한 접근 제한, 검열 등이 한국 민주주의의 패러독스라고 주장했다.

안준현 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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