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1741~1793)는 ‘청장관전서’라는 책에서 ‘일본전서’를 인용해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 백성들이 소년어를 잡기 좋아하는데, 아무리 많이 잡아도 쓸모가 없다’고 했다. 소년어란 세 글자가 아주 새롭다. 이는 촘촘한 그물을 웅덩이에 넣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덕무가 ‘소년어’(少年魚)란 낯선 단어를 사용한 것은, 물고기의 남획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지 200여년이 지난 지금, 그런 걱정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촘촘한 그물로 연근해의 바닥까지 홅는 바람에 어린 물고기도 남아 나지 못하는 것이다.
민속학자 주강현(51) 한국민속연구소장이 최근 출판한 ‘돌살’은, 해양생태계가 파괴되는 이 시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모색했던 돌살의 가치에 주목하는 책이다.
돌살(독살)은 조수간만의 차로 바닷물에 잠겼다 드러났다 하는 조간대(潮間帶)에 쌓은 돌담을 말한다. 밀물 때 바닷물을 따라 들어온 물고기가, 썰물 때 돌살에 갇히면 힘 안들이고 잡을 수 있다. “촘촘한 그물이 보급되기 전만 해도 돌살에는 물고기가 가득했어요. 게다가 치어는 돌 틈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에 싹쓸이 어업이 아니지요.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고기잡이법이었습니다.”
돌살은 전 세계적으로 사용됐는데, 조수간만의 차가 큰 때문인지 우리나라에서 특히 발달했다. 서남해와 제주에서는 지금도 수백년 된 돌살을 쉽게 볼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돌살의 가치를 우리가 너무 모른다는 점이다. “외국과 비교할 일은 아니지만, 일본만 해도 돌살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관광지도에 위치를 표시할 정도입니다. 자연과의 공존 정신이 스며있는 돌살에 우리도 진작부터 관심을 가졌어야 했는데….”
최근 충남 태안군 등 일부 지방자치단체가 관광객 대상의 어업 체험용 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해 돌살 복원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돌살’과 함께 낸 ‘두레’는 농민 공동체 두레의 역사를 살피는 책이다. 전통적인 벼농사는 모내기, 김매기, 가을걷이 등 전 과정에서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주 소장에게 두레는 공동체적 노동조직이자 제의, 풍물을 탄생시킨 연희조직이다. 물론 봉건적 권위주의가 있었고 일제 강점기 때 농민 착취에 이용되는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럼에도 주 소장은 상부상조를 원칙으로 하는 두레의 가치는 여전히 소중하다고 말한다. “인간 소외의 시대에 공동체성의 발현이라는 점에서, 유기적 생태농업이라는 점에서 두레는 충분히 21세기적이며 그 역할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 소장은 두레, 돌살에 20여년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다. 1970년대에 전통문화를 접하면서 두레를 공부했고, 관심 분야를 어업쪽으로 넓히자 돌살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점에서 두 권의 책은 20년 연구의 집대성이다.
박광희 기자 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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