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때 미군이 피난민들에게 총격을 가할 수 있도록 하는 방침을 세웠음을 보여주는 존 무초 당시 주한 미 대사의 서한이 공개됨으로써 노근리 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이 다시 논란에 휩싸일 전망이다.
특히 노근리 학살 사건 전날 미군 방어선에 접근하는 피난민에 대한 사격 방침을 결정했던 미8군사령부 주최 대책회의에는 한국 정부의 내무, 보사부 고위 관계자들과 경찰국장도 참석했던 것으로 밝혀져 파장이 커지고 있다.
AP 통신이 29일 공개한 무초 대사의 미 국무부 앞 서한은 대책회의 참석자들을 ‘G_1(미군 인사참모), G_2(미군 정보참모), 헌병대장, CIC(미군 방첩대), 대사관, 내무 및 사회부, 그리고 경찰국장’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가운데 내무 및 사회부의 경우, 참석자의 직책은 드러나 있지 않지만 한국 정부 관계자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초 대사의 서한이 주목받는 이유는 당시 발포를 포함한 미군의 난민대처 방안이 사전 협의됐다는 것은 노근리 사건이 피난민들에 대한 우발적 발포였다는 미 국방부측의 공식 조사결과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무초 대사는 서한에서 “만약 피난민들이 미군 방어선의 북쪽에서 출현할 경우, 경고 사격을 하되 이를 무시하고 남하를 강행할 경우에는 총격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 국무부에 보고했다. 더욱이 무초 대사는 서한에서 인명 살상을 초래할 이러한 대응이 미국내 여론의 질타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기까지 했다.
미 국방부가 노근리 사건 조사과정에서 무초 대사의 서한을 일부러 누락했다면 조사결과의 신뢰도 추락은 물론 진상 은폐기도로까지 파문이 확산될 수 있다. 미 국방부는 3년간에 걸친 장기간의 조사에서 미 국립문서보관국의 관련 정부문서를 모두 열람했는데, 무초 대사의 서한이 빠진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노근리 사건은 당시 미군 당국의 피난민들에 대한 발포 지침에 의한 것이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또 노근리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유사한 ‘발포지침’이 내려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무초 대사의 서한에 대한 미 국방부가 반응은 현재로선 명확치 않다. 국방부 대변인은 앞서 공식 조사결과만 반복,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때문에 국방부가 노근리 사건의 재조사에 착수할 지 불투명하다.
워싱턴=고태성 특파원 tsg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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