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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칼럼] 피카소, 그 위대성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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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부 칼럼] 피카소, 그 위대성의 뿌리

입력
2006.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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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이 있어야 할 자리에 눈을 그려넣는 화가- 피카소에 대한 평가 중 정곡을 찌르는 표현일 듯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의 평가다. 평론가들은 대부분 피카소가 1907년에 완성한 ‘아비뇽의 처녀들’이 현대미술의 출발선이라는 데 공감하고 있다. 이 그림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새로운 세계인식을 갖게 했다.

이제 미술은 아름다운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아름다움을 포함하여, 신선한 충격과 정신적 자극을 주고 사물의 다른 면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현대미술의 큰 영역이 되었다. 우리는 ‘피카소 그림 같다’는 말에도 익숙하고, 그런 것에서 형용하기 어려운 매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피카소에 의해 미술의 흐름이 바뀌었다.

● 흐루시초프의 정곡을 찌른 평가

‘아비뇽의 처녀들’이 전시회에 출품되었을 때의 미술지 기사는 흐루시초프의 평과 비슷하다. <화면 가득 분절된 형체를 보여주는 여성누드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눈은 이 쪽에, 귀는 저 손은 멀리 있는가 하면 발이 꼭대기에 있고, 입이 그 아래 있기도 하다… 한 미술 애호가가 걸작에 대해 2만 프랑을 주겠다고 제안했으나, 피카소는 더 높은 금액을 요구했다…>

‘피카소 같은 그림’을 그린 것은 데생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어린애처럼 데생한 적이 없다. 12살 때 라파엘처럼 그렸다”는 회고처럼 그는 탁월한 묘사력의 소유자였다. 청색시대와 장밋빛시대, 신고전주의 시대 등에서 드러나는 묘사력은 경탄스럽다. 놀라운 데생력에도 불구하고 낯선 그림에 천착한 것은 세상에 새로운 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요즘 말로 역발상이다. 그의 위대한 역발상은 20세기 내내 화제가 되면서, 새로운 미학과 미감을 앞장 서 이끌었다.

대중의 큰 호응 속에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위대한 세기, 피카소’전이 열리고 있다. 전에도 작은 규모의 피카소전이 열렸으나, 전 생애에 걸친 그의 변화무쌍한 작업을 엿볼 수 있는 큰 전시회는 처음이다. 그에 대한 평가와 세기적 명성에 비할 때, 사실 이번 전시회도 늦은 것이다. 비교하자면, 일본 하코네공원의 ‘조각의 숲’에는 1984년에 피카소관이 세워졌다. 일본인들은 200점 가까운 도예작품과 유화, 데생, 타피스트리 등 300여 점으로부터 거장의 숨결을 느끼며 자극 받아 왔다.

피카소를 7명의 여인과 그림만으로 얘기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초기의 궁핍 속에서도 상업주의에 침몰되지 않고 위대한 예술을 낳은 그의 투철한 정신과 신념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그의 다른 대표작 ‘게르니카’는 부패한 정치집단에 던지는 통렬한 저항의 메시지였다. 일찍이 세계를 향해 이렇게 기이하고도 선명한 조형어법으로 강한 저항을 표현한 그림은 없었다.

1930년대 그의 조국 스페인에서 프랑코 군사정권이 조국을 장악하자 게르니카 지방에 거센 저항이 일었다. 이 때 독일 나치정권이 프랑코를 도와 게르니카를 폭격함으로써, 피카소의 뜨거운 분노가 치솟아 전대미문의 회화로 고발하기에 이른 것이다. 피카소는 1944년 파리 해방 뒤 공산당에 입당한 후 이념적 신념을 버리지 않았으나, 당과는 많은 갈등을 겪었다.

● 그의 저항정신도 함께 말해져야

‘게르니카’와 유사한 그림으로 ‘한국에서의 학살’이 있다. 북한의 남침이 미국의 개입으로 연결되자, 피카소는 한국전쟁에 대해 불안과 우려를 지울 수 없었다. 이 그림에서 총을 겨눈 군인들이 미군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공산당은 이 그림이 창작의 공식 노선을 벗어났다고 비난했다. 너무 간접적ㆍ우회적 표현이라는 것이었다.

미술로 세계적 발언을 하는 신념과, 역발상으로 한 세기 미술의 흐름을 바꿔놓은 용기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다. 불의에 분노하고 자기 신념에 충실한 지성의 결과였다. 이는 또한 지금은 사라져가는 화가ㆍ문인ㆍ평론가 등이 이룬 지성인 사회의 풍속도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박래부 칼럼 수석논설위원 parkrb@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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