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 K고 1학년 이모양은 주위 친구들이 “이거 하나면 된다”며 여러 온라인 사이트의 기출문제 강좌에 목을 매자 자신도 그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이른바 ‘족보 노마드족(기출문제나 요약정리집을 찾아 떠도는 학생)’의 대열에 합류, 영어 수학 과학 등 과목별로 이곳 저곳 사이트를 찾아 다녔다.
시험날 재미를 좀 본 그는 지금까지도 족보만 공부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첫 시험을 제외하고는 족보는 제 역할을 못했다.
#2. 경기 S고 3학년 김모군은 3년째 같은 과외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우고 있다. 일주일에 2번 찾아오는 교사는 올 때마다 영어 단어를 50개씩 외울 것을 주문했다.
김군이 하는 영어 공부는 이것이 전부다. 교과서를 미리 읽어 보거나 문제집을 스스로 풀어본 적은 거의 없다. 김군의 어머니는 “과외를 3년이나 했는데도 아들 영어 성적이 반에서 중하위권을 맴돈다”며 불만스러워 했다.
주식시장마냥 공부도 ‘투자’와 ‘요령’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과목에 대한 진정한 이해나 흥미 없이 오로지 고액 족집게 과외와 기출문제 입수 등 ‘편법 사교육’의 힘에만 의존해 험난한 입시 고지를 넘으려는 것이다.
청소년위원회가 3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99~2004년 중ㆍ고생이 자기 스스로 공부하는 시간은 줄고 학원과 과외를 통해 공부하는 시간은 늘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왜 한건주의에 집착하나
학생들의 공부가 한건주의로 흐르는 원인으로 많은 사람들은 수 년마다 바뀌는 입시 정책을 꼽는다. 학생 입장에선 입시에 대해 예측하고 그 바탕 위에 계획을 세워서 하는 공부가 자칫 부질없게 느껴질 수 있다.
A입시학원 관계자는 “대입 전형 내신비율 확대 등 정부가 사교육을 잡겠다는 정책을 야심차게 내 놓을 때마다 내심 ‘사업 아이템이 또 생겼구나’ 하는 ‘기대 아닌 기대’를 할 때가 있다”고 털어 놓았다.
눈 앞의 결과에만 신경을 쓰는 학부모도 문제다. 경기 성남시 분당에서 영어를 지도하는 박모(30)씨는 “주식 시장에서 종목 몇 개를 잘 골라 대박을 터트리는 것처럼 족집게 과외 선생 몇 명으로 자녀가 입시에서 성공하기 바라는 부모를 보면 난감할 때가 있다”고 씁쓸해 했다.
6년 경력의 수학 과외교사 임모(32ㆍ여)씨는 “과외비를 몇 백만원씩 덜컥 내놓고 ‘어쨌든 성적만 올려달라’는 인사를 한 후 얼굴 한 번 보이지 않는 학부모가 꽤 있다”고 말했다.
개선책은 없나
서울대 교육학과 임철일 교수는 “비록 수준별 학습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학교 환경이지만 학생은 스스로 학습 동기를 부여하며 꾸준히 자기 실력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이른바 ‘자기 주도 학습’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학습 매니지먼트 업체’라는 이름의 사교육 기업이 급속도로 장악하고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대부분 이를 ‘공부 안하고 공부 잘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곳으로 생각한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양분 교육조사연구실장은 “학부모와 교사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 학생에게 ‘이 과목을 공부하면 왜 즐거운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일깨워 줘 공부하는 기쁨을 알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박원기 기자 o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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