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삶과 문화] 귀화자의 외국 姓 존중해야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삶과 문화] 귀화자의 외국 姓 존중해야

입력
2006.05.27 00:07
0 0

외국인들을 만나서 겪는 불편함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성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국인들끼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나 류, 이와 리, 나와 라씨처럼 우리 성을 부르는 데도 신중해야 할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에는 부르기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단일어를 사용하는 단일민족을 지향하면서 이민족조차도 완전히 우리말의 테두리 안으로 동화시켰기 때문이다.

● 이민족의 姓조차 우리말로 동화

그 대표적인 예가 축구선수 이성남이다. 러시아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지낸 이 사람은 K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로 뛰다 한국 국적을 얻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울 대한민국 이민법을 통과한 그에게 우리가 준 최초의 선물은 우리 성과 이름을 붙여준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어질 것이다. 배달민족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성과 이름만큼은 쉽고 분명한 한국인들의 탄생 말이다.

그런데 만일 골프선수 미셸 위의 성이 부시나 클린턴이었다면 어떠할까?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비록 그의 부모가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미셸 위는 100% 미국인이다. 그러니 이성남의 경우처럼 미국 성을 쓴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만일 미국 정부에서 미국 국적을 주면서 위 대신 부시나 클린턴을 사용하도록 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당장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칠 것이다. 강대국의 오만함을 반성하라고 목이 터지도록 외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미국은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의 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고유의 성을 가진 사람은 불과 4분의 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온통 이민자들이다. 그래서 프랑스식으로만 읽어서는 고유명사를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어렵다.

일일이 물어서 확인을 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이민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예술의 나라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앙리 마티스 정도를 제외하면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미술사를 빛낸 많은 예술가는 대부분 외국인이거나 이민자이다. 외국인들을 만나서 겪는 불편함 가운데 하나는 정확하게 성을 부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국인들끼리도 마찬가지다. 물론 유나 류, 이와 리, 나와 라씨처럼 우리 성을 부르는 데도 신중해야 할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 밖의 경우에 처음 보는 성씨나 이름이라 할지라도 문자표기만 있으면 부르기에 어려움이 전혀 없다. 그것은 우리가 단일어를 사용하는 단일민족을 지향하면서 이민족조차도 완전히 우리말의 테두리 안으로 동화시켰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축구선수 이성남이다. 러시아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지낸 이 사람은 K리그에서 외국인 선수로 뛰다 한국 국적을 얻었다.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울 대한민국 이민법을 통과한 그에게 우리가 준 최초의 선물은 우리 성과 이름을 붙여준 일이다. 이와 같은 일은 이전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이어질 것이다. 배달민족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나 성과 이름만큼은 쉽고 분명한 한국인들의 탄생 말이다.

그런데 만일 골프선수 미셀 위의 성이 부시나 클린턴이었다면 어떠할까? 너무 당연한 사실이지만 비록 그의 부모가 한국인이라 할지라도 미셀 위는 100% 미국인이다. 그러니 이성남의 경우처럼 미국 성을 쓴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만일 미국 정부에서 미국 국적을 주면서 위 대신 부시나 클린턴을 사용하도록 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당장 들고 일어나 아우성을 칠 것이다. 강대국의 오만함을 반성하라고 목이 터지도록 외치지 않겠는가. 다행히도 미국은 다양한 국가의 이민자들의 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프랑스 통계청에 따르면, 고유의 성을 가진 사람은 불과 4분의 1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온통 이민자들이다. 그래서 프랑스식으로만 읽어서는 고유명사를 정확하게 발음하기가 어렵다. 일일이 물어서 확인을 해야 할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런 이민의 역사가 있었기에 오늘날 예술의 나라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앙리 마티스 정도를 제외하면 20세기 전반의 프랑스 미술사를 빛낸 많은 예술가는 대부분 외국인이거나 이민자이다.

이런 현상은 미국과 프랑스만이 아니다. 선진국들은 대부분 이민 문호를 개방하여 외국으로부터 우수한 인적 자원을 끌어들이고 있다. 그 과정에서 때로 문화 충돌이나 종교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다양한 민족을 받아들여 국가의 새로운 성장 동력으로 활용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에 반해 우리는 오래전에 쫓아냈던 화교를 이제야 불러들여 차이나타운을 만들겠다는 둥 호들갑을 떨고 있다.

● 한국인 클린턴을 볼 수 있어야

국경이 사라지고 있는 전 지구화 시대에 우리만의 삶이란 북한식의 고립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가 외뮌막?이민을 가듯 외국의 좋은 인적 자원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것을 강요할 게 아니라 그들의 문화와 전통과 종교까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서 부시나 클린턴이라는 성을 가진 한국인들을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박철화 문학평론가ㆍ중앙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