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래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사형 집행이 없었다. 그 여덟 해 남짓 동안 사법부가 사형을 확정한 사람은 예순 명이 훌쩍 넘는다. 국제사면위원회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이 나라에서는 ‘사형의 비공식적 모라토리엄(유예)’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사형제도에 반대하는 국가수반의 철학과 아직은 이 제도의 존치에 더 호의적인 여론 사이의 어중간한 타협이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비정상적 상황을 질질 끌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정부 스스로 법을 어기고 있다. 형사소송법은 사형 판결이 확정된 날로부터 여섯 달 안에 법무장관이 집행명령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 한국, 8년째 사형집행 유예 상태
사형제도가 옳지 않다고 정부가 판단했다면, 그 뒤에 해야 할 일은 사형집행 명령이라는 ‘더러운 일’을 다음 정권에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 협력을 얻어 사형제도를 없애는 것이다.
사형제도에 대한 가치 판단은 쉽지 않다. 폐지론자들은 사형제도가 살인범죄율을 낮추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한다. 옳기는 하다. 그 동안 여러 사회에서 축적된 통계들은 사형제도와 살인범죄율 사이에 상관관계가 거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말하자면 잠재적 살인범죄자에 대해 사형제도가 지니는 위하효과는 거의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존치론자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존치론의 가장 큰 근거는 그런 프래그머티즘 너머의 정의감각이기 때문이다. 존치론자들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보복, 다시 말해 응보를 정의의 실현이라고 판단하는 것이다.
응보를 형벌의 본질로 여기는 이른바 응보형론은 형법학 교과서에서야 ‘구파(舊派)’라는 딱지가 붙은 채 한물간 보수주의 이론으로 치부되고 있지만, 사람들의 보편적 정의감각에는 더할 나위 없이 부합한다. 자유의지로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은 자는 오직 제 생명으로써만 그 죄를 씻어낼 수 있다는 생각에 저항하기는 쉽지 않다.
탈리오법(동해보복법)은 태고의 화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작동하는 법 감정이다. 살인자에게도 인권은 있다는 말은 옳지만, 그 인권이 피해자나 그 가족의 인권에 앞설 수는 없다고 존치론자들은 생각한다.
게다가, 사형제도의 위하효과와 마찬가지로, 다른 형벌의 교육효과도 입증된 바 없다. 그렇기는커녕 교도소는 흔히 범죄학교 노릇을 하고 있다. 최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른바 ‘사이코패스’ 살인범죄자들에게는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정신의학자들은 말한다.
존치론의 이런 근거들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그러면서도 사형제도를 없애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여럿이지만 크게 두 차원이다. 첫째는 정의의 이름으로 동류(同類)의 생명을 앗는 것이 인류의 자존감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둘째는 오심의 가능성 때문이다.
국제사면위원회에 따르면, 1970년대 이래 사형이 확정된 사람 가운데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미국에서만 일백 수십명에 이른다. 이들은 죄 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었던 사람들이다. 인간의 판단 능력은 제한적인데, 이런 제한적 판단력에 기대어 돌이킬 수 없는 형을 집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
사형 대상 범죄를 지금보다 크게 줄인다고 해도 이런 사정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미 86개 나라에서 사형제도를 없앤 데에는, 이 제도가 살인범죄를 억제하지 못한다는 경험칙말고도 그런 철학적 실천적 판단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금의 사형제도는 가석방이 거의 불가능한 종신형제도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 사회로부터의 종신 격리는 살인범죄자에 대해 피해자 가족이나 사회 일반이 지니게 마련인 보복감정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오심에 대해 치유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
종신형은 또 사회방위 효과에서도 사형에 뒤지지 않는다. 굳이 사형을 통해 범죄자에게 보복하려는 집착은 사회적 차원에서 피해자 가족을 도우려는 연대의 노력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종석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