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은 2006 월드컵에 임하면서 “독일은 축구다”라고 주장했다. 나는 “축구는 한국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게 그 말 아니냐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의미가 좀 다르다. 한국보다 축구를 더 잘 하는 나라는 다 자기 나라가 곧 축구라고 주장하겠지만, 축구가 한국이라는 건 한국이 축구를 매개로 한 정치사회적 의미 부여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나라라는 뜻이다.
축구가 한국이기 위해 한국 축구가 세계 정상권에 속할 필요는 없다. 확고부동한 정상권에 속하면 오히려 한국에선 축구 열기가 시들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축구를 너무 못해도 곤란하다. 늘 패배만 당하는 축구대표팀에 범국민적으로 열광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적당히 잘 해야 한다. 세계 4강에 오르는 것이 ‘기적’으로 불릴망정 불가능하지는 않을 정도여야 한다. 그래야 기대, 희망, 꿈 등이 살아 꿈틀거리고 격정과 환희가 가능해진다.
● 축구 자체보다 축구 외적 의미 증시
한국인은 축구를 사랑하지만 축구 그 자체보다는 축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치와 의미를 더 사랑한다. 국가 대항전, 그것도 월드컵과 같은 최고ㆍ최대의 국가대항전엔 열광하기도 하지만, 국내 축구엔 비교적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한국 축구 팬들은 매우 점잖은 편이다.
폭력사태가 벌어져봐야 주위에 뜯어 말리는 사람들이 많아서 오래 가지 못한다. 평소 축구 팬도 아닌 사람들이 국가 대항전에 미쳐봤자 그것도 얼굴 표정과 몸짓으로만 표현할 뿐, 늘 국가ㆍ민족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대단히 평화적이다.
지난 2002 월드컵 때 15개국 대표팀의 응원을 위해 헌신한 10만 ‘코리언 서포터즈’의 활동은 다른 나라에선 상상하기 어려운, 지극히 한국적인 현상이었다. 사실 이게 23만 ‘붉은악마’보다 훨씬 더 놀라운 일이었다.
한국인들의 그런 국가ㆍ민족주의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지만, 그게 오히려 축구 자체에 미치는 것보다 덜 위험하다는 점에 주목해보면 좋겠다.
493명의 사상자를 낸 1985년 헤이셀 참극, 265명의 사상자를 낸 1989년 힐스버루 참극은 모두 영국의 악명높은 훌리건들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328명의 사망자를 낸 1964년 페루-아르헨티나전 폭동, 2,000~3,000명의 사망자를 낸 엘살바도르-온두라스 전쟁으로 비화된 1969년 월드컵 예선경기 등은 오히려 순수한 축구 사랑이 더 위험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축구의 본질은 카타르시스다. 국제ㆍ국내적 갈등의 대리 전쟁이다. 이러한 대리성의 원칙에 가장 충실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순수한 축구 사랑은 ‘종교’로 빠지게 돼 있다. 반면 순수하지 않은 한국인들은 축구 외적 의미에 충실하기 때문에 그들의 정열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요 일시적으로 끓고 마는 ‘냄비’다. 이게 꼭 나쁜 게 아니다. 좋은 점이 더 많다.
축구는 독특한 집단주의적 가치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몰아치는 격렬한 경쟁이라는 두가지 요소를 동시에 갖고 있는 스포츠다. 이는 바로 한국사회의 특성이기도 하다. 여기에 한국의 불행했던 근현대사가 한국인의 유전자에 각인시킨 ‘자기 존재 증명’ 욕구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강하다.
● 불행한 역사로 인한 인정욕구 내재
축구가 한국이라고 하는 건 2002 월드컵보다는 오히려 일제 치하를 비롯하여 ‘춥고 배 고프던’ 시절에 더 잘 드러났다. 당시 축구는 한(恨) 풀이와 카타르시스의 매개체였다. 1936년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때 심훈이 “이래도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외쳤듯이, 처절한 인정투쟁이 20세기 한국을 내내 지배했다.
2000년대 들어 아직도 못 채운 인정욕구에 축구를 축제로 즐기려는 놀이 욕망이 결합되었다. 이미 불기 시작한 월드컵 열풍 속에서 “나는 왜 이럴까?”라는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진 않다.
강준만 전북대 신방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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