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세 논쟁이 뜨겁다. 신세계 정용진 부사장이 중국 상하이에서 1조원에 달하는 상속세를 내더라도 떳떳하게 경영권을 승계하겠다고 발표하는가 하면, 재계의 이익단체인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오히려 같은 날 정부에 상속세제 개편을 요구하고 나섰다. 경영권 상속을 둘러싼 재벌가의 속사정과 정부 입장을 진단하고, 외국 사례를 소개한다.
■ 재계 "세금 내고 나면 경영권 유지 못해"
●1. 교보생명 신창재 회장은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다.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까지 지냈으니 국내 산부인과 분야에서는 최고의 권위자다. 그랬던 그가 보험사 최고경영자(CEO)가 된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고 신용호 창립자는 ‘산부인과 의사가 더 좋다’는 아들의 뜻을 꺾고 2000년 회장 자리를 물려줬다.
●2. 2004년 A그룹 계열사가 2년 전 부장으로 입사했던 오너의 장녀를 임원으로 선임했다. A그룹은 ‘경영 수업을 착실히 밟아가고 있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그러나 외신들은 “외환위기 이후 A그룹 지배구조가 개선된 줄 알았는데, 회장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경험 없는 젊은 여성이 임원이 된 걸 보니 (지배구조 개선은) 아직 멀었다”고 보도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재계가 상속세율을 대폭 인하하는 방향으로 상속세제를 개편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부 외국의 사례를 들어 상속세를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도 나오고 있다.
재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전경련이 상속세 문제를 들고 나온 배경은 뭘까. ‘가업(家業)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재벌가의 유교적 의식구조와 최근 부쩍 촘촘해진 상속세제 때문이다. 경영권을 자식에게 넘겨주고 싶은데, 최근 5년 사이 상속세제가 대폭 강화되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경영권 세습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재계가 문제삼는 것은 높은 상속세율과 상속세 포괄주의다. 현재 상속세 규정에 따르면 상속재산이 20억원을 넘어가면, 20억원 초과분에 대해 50%의 상속세가 매겨진다. 게다가 경영권이 이전되는 경우에는 기존 세율에 20~30%의 할증세가 더 붙는다.
평가액이 수 천억원에서 수 조원에 달하는 재벌 계열사 지분을 물려 받는 오너 자녀들의 경우에는 상속세 규모도 감당하기 힘들지만, 고율의 상속세를 내고 나면 지분이 크게 줄어들어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된다. 이런 점에서 현재와 같은 과도한 상속세 체계를 손볼 필요가 있다는 게 재계의 주장이다.
현행법상 50%의 상속세율을 적용할 경우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상장ㆍ비상장 주식 가치 2조7,039억원-포브스 코리아 추정)과 현대ㆍ기아자동차그룹 정몽구 회장(2조7,277억원)의 자녀들은 각각 1조3,500억원 가량을 내야 한다. 또 신세계 이명희 회장 부부(약 2조원)와 SK그룹 최태원 회장(5,856억원)의 지분 상속과정에서는 각각 1조원과 2,800억원 가량이 상속세로 부과된다.
상속세 포괄주의는 과거 재벌 1세대가 2세대에게 넘겨주면서 사용했던 ‘편법 상속’의 기회를 차단했다. 1996년 삼성이 에버랜드 전환사채(CB)를 이용해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에게 그룹 지배권의 상당수를 넘기던 시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상속세는 ‘열거주의’ 였다. ‘열거주의’란 법조문에 있는 재산에만 상속세를 부과하는 방식이다.
과거 삼성 현대 등 거대 재벌의 상속ㆍ증여세가 일반의 예상에 크게 미치지 못했던 것도, 법조문에 규정하지 않은 희한한 방법으로 부가 세습됐기 때문이다.
삼성이 ‘열거주의’를 이용해 경영권 세습에 성공한 뒤 여론이 악화하자 정부는 조문에 명시되지 않아도 과세할 수 있는 포괄주의를 2002년 도입했다.
상속세 논란은 황제경영, 순환출자 등 한국 재벌의 아킬레스건과도 맞닿아 있다. 상속세제 개편문제는 폭발성이 강한 고감도 이슈인 점을 감안할 때, 공론화를 통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보유 지분의 8배나 되는 의결권을 행사하는 오너일가의 경영권을 보장하는 방안에 대해 국민들이 동의할 만큼 재벌이 우리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가 등이 상속세 논란과 얽혀 있기 때문이다.
조철환 기자 chcho@hk.co.kr
■ 정부·시민단체 입장
최고 50%의 상속세율과 포괄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우리나라 상속세제에 대해 재계와 정부·시민단체의 입장은 뚜렷하게 엇갈린다.
재계는 현행 상속세제는 기업성장을 위축시키고 기업가의 의욕을 꺾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세율을 인하하고, 포괄주의도 포기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현행 세법상 기업상속에 따른 세부담이 과도하며 이를 회피하기 위해 오너들이 기업규모 확대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또 수익을 기업의 장기발전을 위해 재투자하기 보다는 배당 등 개인자산으로 유출할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한다.재계는 지나친 상속세가 기업경영권을위협하고 있다는 논리도 펴고 있다. 지분상속 과정에서 50%의 지분을 세금으로 낼경우, 경영권을 넘겨받은 아들의 지배권은 아버지의 절반에 불과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율의 상속세가 변칙 상속 및 증여를 유도하고 경영의욕을 꺾는다는 주장에 대해 정부와 시민단체는“재계가 경영능력과 윤리의 문제를 세금탓으로돌린다”고 반박한다.우선 정부는 우리나라 상속세체계가 다른 나라에 비해과도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재정경제부 김용민 세제실장은“현행 상속세율은 독일이나 일본 등에 비해 결코 높지 않고 더구나 가업 승계시 최대 15년간 분할납부를 인정해 주고 있어 큰 문제가 없다”고 밝혔다.
정부는 상속세 폐지가 세계적 추세라는 재계주장에 대해서도“내용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일부 국가에서 상속세가 폐지된 것은 사실이지만 세목만 없어졌을 뿐, 상속자산을 양도차익으로 간주해 세금을 물리는 나라도 있고 일반소득이나 자산에 대해 우리나라보다 높은 세율로 과세하는 나라도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상속세는 없더라도 선진국들의 기업 오너나 자산가세부담은 우리나라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정부관계자는“우리 기업인들도 빌게이츠나 조지소로스처럼 미국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상속세 폐지 반대운동에 앞장선다는 점을 상기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민단체도 공평과세와 재벌개혁차원에서 재계의 상속세 폐지론을 비판하고있다. 참여연대 조세개혁센터는“현재 상속세 납부비율이 1%에도 미치지 못한다”며“재계의 주장은 조세형평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돈많은 부모밑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세금없이 부와 경영권을 세습하려는 것이 오히려 시장경제원리에 역행한다고 반박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조철환기자
■ 해외 사례… 완화·폐지 점차 늘어
모든 나라에 적용될 수 있는 상속세에 대한 모법 답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 국가별로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배경, 구성원간 합의 과정 등이 다른 만큼 상속세를 바라보는 시각도 각양각색이다. 다만 최근 투자 유치 및 기업 의욕 고취 등을 위해 상속세를 폐지 또는 완화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상속세는 당초 부의 집중을 억제하고 사회 구성원들에게 평등한 출발점과 기회 등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먼저 소득세를 부담하며 축적한 정당한 부에 대해 다시 상속세를 매기는 것은 2중 과세라는 논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최근 ‘상속과세 제도의 합리적 개편 방안’ 보고서를 통해 “상속세 강화를 통해 경제적 기회 균등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이에 따라 상속세를 폐지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캐나다는 1972년 자본이득세로 상속세를 대체했다. 호주는 77년, 뉴질랜드는 92년 상속세를 없앴다. 이탈리아와 포르투갈, 스웨덴 등은 2004~2005년 상속세를 없앤 대신 상속 시점과 처분 시점의 차액에 대해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영국도 90년부터 상속세를 대폭 완화했고, 독일은 경영권 상속에 대해서는 일반상속보다 적은 상속세를 부과하고 있다. 미국은 상속 때 자녀가 주정부에 납부하는 상속세만 존속시키고 부모가 연방정부에 납부하는 유산세는 영구 폐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홍콩이 2월 내ㆍ외국인은 물론 영구거주자에게도 상속세 부과를 전면 폐지했다. 싱가포르도 2~3년내 상속세를 폐지할 예정이고, 대만도 상속세율을 50%에서 40%로 내릴 계획이다.
박일근기자 i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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