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TV 스타가 청소년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 이전, 각 반마다 소위 ‘문학소녀’라는 친구들이 존재했다. 책읽기를 좋아해서 항상 책을 옆에 끼고 사는 친구들이다. 헤르만 헤세나 릴케의 작품을 읽으며 가슴앓이를 겪기도 하고, 때로는 명작을 통해 만난 주인공이 전 인생의 좌표가 되기도 했다. 세상에 대한 감수성이 극도로 날카로웠던 그 시절 싱클레어나 베르테르, 전혜린은 자신의 삶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자아를 찾아가는 힘겨운 암중모색의 길에 훌륭한 나침반이요 등대였다.
문자는 글쓴이의 감정과 정보를 가장 세련되고 유능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매체 중 하나다. 지식과 정서는 문자 매체에 담겨 핍진하고 곡진하게 전달될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의 학생들은 문자매체의 사용에 능한 경우가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 부모와 자녀의 충돌은 가끔 각자에게 익숙한 매체의 차이에서 비롯되기도 한다. 부모들은 자식들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도대체 왜 읽고도 모르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영상을 비롯한 여타의 현란한 매체에 젖은 자녀들에게 문자매체는 너무 따분하고 불친절하며 투박한 도구일 뿐이다. 아이콘과 이미지에 익숙한 아이들은 이미 문자조차 이모티콘으로 바꾸어 버렸다.
하지만 독서능력이 기반에 깔리지 않은 상태에서는 고급 정보를 이해하고 구조화하는 ‘추상화 작업’이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추상화 작업은 질 높은 학습을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능력이다. 추상화에 능숙하지 않은 학생들은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비하여 만족할 만한 학습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과제를 극복하기 위해 많은 학생들은 더욱 맹렬하게 사교육에 매달릴 뿐이다. 누군가 눈앞에서 말해주고 보여주고 소리쳐주어야만 조금쯤 이해한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교육에 대한 의타심이 깊어질수록 학습적 자생력은 도태될 수밖에 없다.
행여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감하는 학생들도 독서를 위해 또 다시 책읽기 학원을 등록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 어머니 때문에 독서학원을 강제로 다닌 이후부터 책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졌다는 학생을 가끔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시원한 해답은 아닌 듯하다. 책 읽기가 억지 공부처럼 강요를 통해 익숙해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독서가 취미’라는 말 속에는 글 읽는 사람의 즐거운 호기심이 동반될 때만이 독서를 통한 보람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명작에 빠져 밤잠을 설쳤던 그 시대의 열정을 지금의 학생에게 기대하는 것은 너무 고색창연한 시대착오적 발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뛰어난 독서능력을 가진 학생치고 학과 공부가 어려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학생은 흔치 않다는 것이다. 교과서는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확장하는 독서의 또 다른 연장이기 때문이다. 독서 능력은 새로운 지식을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한 최전방의 학습 역량이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책 한 권도 변변히 읽을 여유가 없다는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공부의 과정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다.
/학습전문가ㆍ에듀플렉스 대치원장 김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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