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세기-파블로 피카소’전이 이번 토요일(20일) 개막한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9월 3일까지 계속되는 이 전시에는 피카소의 전 생애에 걸쳐 시기별 대작과 걸작을 포함한 140여 점이 선보인다.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화가로 불리는 피카소의 전모를 파악할 수 있는, 사실상 국내 최초의 대규모 회고전인 것이다. 이번 전시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어떤 점에 주목하면 좋을지, 이번 전시의 커미셔너인 서순주씨의 도움말로 살펴본다.
작품 이해의 열쇠, 피카소의 여인들
피카소의 작품은 철저히 자전적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글로 자서전을 쓸 때 나는 그림으로 내 자서전을 쓴다”고 했다. 따라서 그의 삶을 아는 것이 작품 이해의 첩경이다. 미리 알고 가기 힘들다면, 전시장에 걸린 피카소의 연대기라도 자세히 읽어보는 게 좋겠다.
피카소의 삶에서도 작품 이해의 가장 중요한 열쇠는 여인들이다. 피카소는 92년의 생애 동안 수없이 많은 여인을 만났고, 누구보다 정열적으로 여인을 사랑했으며, 새로운 여인을 만날 때마다 새로운 작품 세계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7명의 여인과 각각 함께 한 기간은 피카소 작품 표현양식의 변화에 따라 그 경향을 구분하는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들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가 ‘아무개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즉 페르낭드 시대(1904~1912), 에바 시대(1912~1915), 올가 시대(1917~1935), 마리 테레즈 시대(1927~1937), 도라 시대(1936~1943), 프랑수아즈 시대(1943~1953), 자클린느 시대(1952~1973)는 각각 입체주의, 종합적 입체주의, 고전주의, 초현실주의풍과 인체 변형, ‘게르니카’와 2차대전, 2차 대전 전후 시기, 말기의 양식적 변화와 짝을 이룬다.
피카소가 자신만의 세계를 최초로 선보인 청색시대(1901~1904)는 페르낭드를 만나기 전, 절친한 친구였던 화가 카사헤마스의 죽음이 계기가 됐다. 그는 실연당해 자살했다. 당시 19세의 피카소는 그 영향으로 젊은 날의 고독과 우울을 푸른 톤으로 그리기 시작했고, 청색시대의 그림은 창녀, 거지, 장님, 부랑아, 광녀 등으로 채워졌다. 페르낭드를 만나면서 화면이 밝아지면서 장미시대(1904~1906)가 열리고 그는 서커스 광대와 여인 누드 등을 그리게 된다.
피카소는 피카소 자체로 봐야
피카소는 ‘○○주의’로 불리는 어떤 사조에도 속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시대나 사조를 떠나 스스로 가장 위대한 작가이기를 원했다. 그의 목표는 미술의 전체 역사와 대면하고 그것에 도전하는 것이었지, 특정 시대에 자리잡으려는 게 아니었다. 들라크루아, 벨라스케스, 쿠르베 등 대가들의 작품을 수십 점씩 재해석ㆍ변형한 것도 그러한 도전 의식의 산물이다. 따라서 피카소는 어느 시대 어느 양식과도 견줄 수 없으며 피카소 자체로 봐야 한다.
피카소는 평생 끊임없는 실험으로 자기 혁신을 거듭했다. 그런데도 ‘피카소=입체주의’로 통하는 것은 입체주의가 서양미술사의 가장 위대한 혁명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는 그의 말은 원근법에 기초한 르네상스 이후 서양미술 500년의 전통을 일거에 무너뜨린 입체주의의 토대이자, 1970년대 등장한 개념미술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의 입체주의는 초현실주의, 추상미술, 개념미술 등 현대미술의 모든 모험에 길을 열어주었다. 피카소 자신은 ‘나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다’ 라고 했지만, 앙드레 부르통은 피카소를 ‘초현실주의의 선구자’라고 불렀다. 추상을 거부했던 피카소는 대상을 잘게 쪼개어 해체하는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에도 구상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지만, 추상미술은 그의 작업을 바탕으로 탄생했다.
오미환기자 mhoh@hk.co.kr
■ 피카소가 사랑한 7여인들
피카소의 작품 세계를 이야기 하는 자리에는 빠짐 없이 그가 사랑했던 7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그는 열정적인 삶을 수많은 여인들과 함께 했으며, 그 여인들은 피카소의 작품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23세 때 만난 첫 애인을 시작으로 피카소는 만나는 여인과 평균 10년 주기로 동거를 했고 두 번 결혼했다.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피카소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다.
피카소가 처음 사랑한 여자는 유부녀였다. 1904년 파리로 영구 이주했을 때 만난 프랑스 여인 페르낭드 올리비에. 그는 피카소의 모델이었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지고 만다.
친구였던 화가 카사헤마스의 자살로 충격을 받아 푸른 계통의 어두운 그림(청색시대)만 그리던 피카소는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면서 그림 스타일을 바꾼다. 화려한 입체파풍의 작업을 많이 했고, 밝은 복숭아 색으로 어릿광대와 곡예사(장미 시대)를 주로 그렸다. 첫사랑 페르낭드 올리비에와는 8년간의 동거 끝에 헤어진다.
피카소는 곧 바로 두 번째 연인 에바 구엘(본명 마르센 움베르)과 만난다. ‘기타’란 작품에 ‘나는 에바를 사랑해’라는 글을 써넣을 만큼 적극적이고도 공개적으로 사랑을 표현했다. 에바 구엘은 그가 만난 여자 가운데 가장 가냘프고 여성스러웠지만 만난 지 4년 만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 번째 여인은 러시아 무용수 올가 코클로바. 1917년 러시아 발레단 공연 무대장식을 맡은 피카소는 우아하고 고전미 넘치는 코클로바에게 끌렸다. 1년 연애 끝에 이듬해 결혼했고, 그때부터 ‘고전주의’ 그림을 그렸다. 그와 사이에 첫아들 파울로를 낳았으나 결혼 4년 만에 부부관계가 소원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피카소는 파리의 한 백화점에서 17세의 어여쁜 소녀 마리 테레즈 발터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그는 팔등신의 이 늘씬한 소녀에게 홀려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모델이 돼달라고 부탁하고, 그녀는 이후 10년간 피카소의 연인이자 최고의 모델이 된다. 부인 코클로바가 이혼을 해주지 않는 바람에 피카소는 발터와 오랫동안 몰래 사랑을 나눠야 했다.
발터는 주로 그의 작품에서 ‘잠자는 여인’이나 ‘꿈꾸는 여인’으로 표현됐으며, 주로 화려한 초현실주의풍의 그림을 그렸다. 발터는 1935년 딸 마야를 낳았으나 피카소는 발터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같은 시기에 부인 코클로바와도 이혼한다.
이듬해인 1936년 피카소는 친하게 지내던 초현실주의 시인 폴 엘뤼아르로부터 사진작가 도라 마르(본명 마르코비츠 앙리에뜨)를 소개 받는다. 그는 스페인어가 능통하고 지적인 여자였다. 그는 피카소의 ‘게르니카’ 시대를 함께 했으며, 이 작품의 제작 과정 전체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우울한 2차대전의 시기를 함께 한 마르는 피카소 작품에서 주로 ‘우는 여인’으로 등장한다.
여섯 번째 연인은 법대를 졸업하고 화가로 활동하던 프랑수아즈 질로. 피카소는 질로의 첫 전시회에서 그를 만났다. 프랑수아즈 질로를 만나는 동안 피카소는 가족, 삶의 기쁨, 평화 등을 주제로 작업을 했으며, 주로 ‘꽃여인’으로 그려졌다.
전형적인 예술가로서의 삶을 사는 피카소와의 생활에 염증을 느낀 프랑수아즈 질로는 피카소를 차버린 유일한 여자. 그는 피카소와 헤어진 후 ‘피카소와 산다는 것’이라는 책을 통해 그와의 10년 동거생활을 낱낱이 폭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피카소와의 사이에서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다.
피카소가 작품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내조해준 마지막 여자 자클린느 로크는 피카소가 80세 되던 해 만난 여인이다. 그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 딸이 있는 이혼녀로, 피카소와 8년간 동거한 뒤 결혼했다.
피카소와 함께 한 7명의 여인들은 어머니이자 아내, 친구, 모델로서 그의 작품 열정을 자극했지만 그가 원할 때는 조용히 떠나야 했다.
조윤정기자 yj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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