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눈을 떠서 쌀이랑 압맥, 찹쌀을 적절히 섞어서 물에 씻는다. 씻은 쌀을 솥에 담고 물을 부은 다음 다시마를 한 장 띄워 밥을 한다.
슬슬 잠이 깨면 세수와 양치질을 간단히 마치고, 까슬까슬한 종이로 만든 여과지를 찾아 향 좋은 커피 원두로 반쯤 채운 후 주전자에 얹고 끓인 물을 부어 싱싱한 커피를 한 잔 뽑는다.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들인다. 커피를 마시면서 신문을 읽다 보면 남편이 부스스 잠을 깬다. 아침 준비에 속력이 붙는다.
따끈한 국이랑 소소한 밑반찬 몇 개, 계란이랑 두부는 바짝 지지고 구운 김을 곁들여 향을 낸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뚝딱 마치면 다시 설거지. 설거지를 마치면 어질러졌던 식탁을 중심으로 집안 정리에 들어간다.
어젯밤에 뒤적이다 쌓아 둔 잡지나 책, 소파에 널린 빨래 감이나 벗어 둔 양말 혹은 셔츠,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품 분리수거 물 등을 후딱후딱 분류한 다음 세탁기를 돌리고 집안을 환기 시킨다. 벌써 오전 10시 반을 넘기고 있다.
▒ 요리의 기쁨
맞벌이 주부인 나의 아침 모습은 대충 이렇게 시작 된다. 다행히 특정 회사에 속해 있지 않은 프리랜서라서 일하는 시간 조절이 비교적 쉽고, 그래서 가급적이면 오전 중에는 가정생활에 집중하는 편이다.
하루 종일 집에서 원고를 써내야 하는 날이나, 내가 아무 스케줄도 없는 날에는 남편이 점심을 먹으러 집으로 온다. 그런 날에는 정말, 방금 아침 차린 것 같은데 또 밥을 차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메뉴를 궁리하고 요리를 하기 시작하면 또 금시 피곤을 잊는다.
점심을 먹고 나면 빨래가 다 돌아간 상태. 점심 설거지를 마치고 빨래를 꺼내어 건조할 것은 널고, 그대로 마른 것은 착착 접어 넣는다. 산보 삼아 시장에 다녀오면 벌써 오후가 다 가고, 열어 둔 창가에 서울 먼지가 다 쌓였다 싶어서 한번 닦아내고 장 봐 온 것 손질 좀 하고 나면 저녁시간. 또, 저녁밥을 할 때다.
‘나 혼자 살 때는 아무 거나 먹고, 아무 때나 자고 일어나고, 정리는 내켜야 했는데’ 하고 투덜대면서 또 주방으로 들어선다. 불을 켜고, 팬에 기름을 두르고 다진 마늘 약간을 볶다가 버섯이랑 양파를 볶고…. 나 한 사람 서 있으면 빠듯한 주방이 열기로 가득 찬다.
냉동고를 열어 보니 음식 촬영 때 썼던 고기가 좀 남아있다. 얼른 해동시키고 감자랑 볶아서 카레 가루를 조금 넣어 양념을 한다. 좁은 부엌은 카레 향기로 한껏 분위기가 오르고, 쌈 채소에 매콤한 향신료와 피시소스를 넣어 다진 고수 잎과 버무린 동남아 스타일의 겉절이나 피클 향신료에 절여 놓았던 고추를 꺼내면서 나의 기분은 180도 전환되기에 이른다.
▒ 향신료의 힘
일전에도 여러 번 강조했지만, 향신료는 매일 먹는 일상 식(食)을 한 순간에 바꿔 버리는 마법의 양념이다. 영어로는 ‘스파이스(spice)’라 부르는데, 가루 형태로 만든 향신료는 물론이고 참깨나 들깨처럼 향을 머금고 있는 씨앗 형태의 알갱이와 로즈마리나 민트와 같은 잎사귀 형태의 허브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향신료의 힘을 쉽게 상상할 수 없다면 참기름의 효과를 떠올려보자. 조물조물 무쳐 낸 나물에 참기를 한 방울을 넣으면 그 향기와 윤택함이 얼마나 요리를 업그레이드 시키는가. 향신료는 이렇게, 생활 속에 지니고 있다가 무언가 지루하다 느낄 때 톡 쏴 넣으라고 있는 것이다.
고대의 향신료는 소금이나 금, 은처럼 ‘화폐’의 기능으로 물물 교환되기도 했다. 제약이 발달되기 전에는 향신료의 일종인 ‘허브’가 위생이나 소화기관을 다스리는 약처럼 쓰이기도 했고. 그 예로 연중 고온인 아랍권 나라들에서는 아직도 민트로 만든 차를 물처럼 마신다.
향신료가 발달한 대표적인 퀴진으로는 터키 요리를 들 수 있는데, 동서양의 문화가 함께 발달해 온 이스탄불은 아직도 많은 인구가 살고 또 다녀가면서 그 맛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요리, 중국 요리와 더불어 세계적인 미식 메뉴로 꼽히는 그네들의 식탁을 보면 그러나 의외로 소박하다. 양고기를 비롯한 육류 약간, 빼놓지 않고 곁들여 줘야 하는 요구르트, 밥이나 만두가 곁들여진다.
이렇게 비교적 단순한 식재료들이 어떻게 세계적인 미식메뉴가 되었느냐 하면, 바로 향신료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터키인들의 오랜 요리법 덕분이다. 각종 향신료로 맛을 낸 밥을 포도 잎으로 쌓아 만드는 ‘돌마’나 다양한 고기 완자, 그리고 향신 야채와 향신 분말을 적절히 사용하여 맛을 내는 양고기 요리 등은 요리하는 이가 어떤 향신료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천지차이의 맛을 내기 때문에 그 향신료의 비율이 ‘가문의 비밀’로 부쳐지기까지 한다.
정통 터키식의 요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입에 맞는 향신료를 두셋 갖추어 두었다가 해동시킨 고기나 완자를 구울 때 첨가해보자. 냉동실 냄새나 기타 잡내가 싹 사라지고 새로운 맛이 난다.
특히 양고기에 어울리는 큐민이나 카르다몸, 터마릭이나 로즈마리는 소금 간만으로 구운 고기를 찍어 먹기에 좋고, 육두구는 버터를 섞은 감자나 크림소스에 뿌리면 맛있다. 사프란은 밥을 볶을 때 넣어 향을 내기에 맞춤이며 칠리 가루는 겉절이나 샐러드, 토마토소스에 섞는다. 여기에 설탕과 민트 잎을 짓이겨 뜨거운 물에 우려 낸 차라도 곁들이면 일상의 피로가 싹 풀릴 것이다.
가사(家事)는 지루하다. 반복적이고, 끝없고, 보너스도 안 생긴다. 가끔은, 향신료를 듬뿍 친 요리로 기분을 새롭게 하듯 약간의 스파이스(spice)로 가사의 지루함을 극복 해보자.
EBS 요리쑥 사이쑥 진행자 박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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