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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에 집사기 까다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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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울에 집사기 까다로웠다

입력
2006.05.12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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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주택 매매 사실을 확인하는 이웃들의 연대 증명서(봉초기ㆍ捧招記)와 한성부 산하 5개 부 중 하나인 북부(北部)가 매매에 의한 주택 소유권 이전 확인을 한성부에 요청한 문서(첩보ㆍ牒報)의 존재가 처음 공개됐다.

서울대 규장각 양진석(梁晋碩) 학예연구사는 11일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정례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한 '고문서로 본 조선시대 생활사-가옥 거래'자료에서 봉초기와 첩보를 공개했다.

문중이 발간한 문집 등을 통해 비교적 연구가 잘 돼 있는 지방과 달리 조선시대 서울의 주택 거래 연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규장각이 소장한 428건을 포함, 서울의 주택 매매 문서는 외부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양 연구사는 "조선시대 서울의 주택에 대해 연구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재산 형성과 주거 환경이라는 두 관점에서 조선시대 서울 지역 주택에 관한 연구를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엄격했던 주택 거래

서울의 주택 거래는 지방보다 절차가 까다로웠다. 조선시대에 집을 사고 팔려면 매도ㆍ매수인의 이름, 매매 일시와 사유, 집 칸수, 집 값, 증인과 문서 작성자(필집ㆍ筆執)의 서명 등이 들어간 매매 문서, 매도인과 증인과 필집이 거래가 사실임을 밝힌 진술서 성격의 초사(招辭), 동장 격인 방장(坊長) 등의 서명을 붙여 소유권 이전을 관청에 요청하는 민원서인 소지(所志) 등이 필요했다. 이 같은 서류가 제출되면 관청은 소유권을 인정하는 입안(立案)을 발부했다.

그런데 서울에서는 세 명의 이웃(삼겨린ㆍ三切隣)이 거래를 확인해주는 봉초기, 지금의 구청에 해당하는 각 부(部)가 서울시청 격인 한성부에 소유권 이전 승인을 요청하는 공문서인 '첩보'가 더 필요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양 연구사는 "한성부는 집 거래나 소송 관련 업무를 맡고, 형조는 법률 문제를 맡았다"며 "주택 규정 중 지방 관련 내용은 거의 없으며 서울에서도 도성 안팎의 규정이 달리 적용됐다"고 밝혔다.

주택은 재산형성 수단

조선 후기에도 집 값은 꾸준히 올랐다. 영조 26년(1750년) 한성부 북부 관광방(觀光坊)의 조태린은 기와집 40칸(마당 등 빈 땅은 68칸)을 은자 570냥(당시 은자 3냥은 쌀 한 가마니 값에 해당)에 팔았는데, 그는 이 집을 이보다 5년 전에 은자 500냥에 사들였다. 5년 만에 은자 70냥의 차익을 본 것이다.

양 연구사가 200여년간 15차례 정도의 매매 기록을 조사한 한성부 중부 장통방(長通坊)의 19칸 기와집의 경우 숙종46년(1720년) 은자 160냥에 팔렸는데 63년 후인 정조7년에는 은자 350냥으로 2배 이상 값이 뛰었다. 17년 후인 정조24년에는 동전 900냥(은자 450냥 정도), 고종원년(1864년)에는 동전 2,500냥(은자 1,250냥 정도)으로 올랐다. 18세기까지는 집 매매에 은자가 사용됐지만, 19세기부터는 동전을 주로 썼다.

이밖에 지금의 리모델링처럼 구입 뒤 집을 조금 고쳐 곧 되파는 경우도 눈에 띄고, 증ㆍ개축도 활발했다. 집 외에도 종로 미전계(米纏契)의 초가 등 시전(시장) 건물이나 주점 등을 사고 팔거나 전세 계약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거래는 노비 손에

양반들은 돈 문제를 직접 다루지 않았다. 대신 집 거래 시 노비를 위임자로 내세웠다. 조태린의 집도 매매 증서에 '윤생원 댁 노비 엇남'에게 팔린 것으로 돼 있고, 엇남은 노비지만 한성부에 자신의 이름으로 소유권 확인을 요청했다. 한성부도 엇남의 이름으로 '입안'을 내줬다.

이 과정에서 관청에 거래 사실을 확인해 준 '삼겨린' 중에도 '맛금(맛쇠)''팔금(팔쇠)' 등 사노비 2명이 포함돼 있다. 장통방 기와집 매매 기록에도 '예선''순상' 등 노비가 주인 대신 거래에 나섰다. 양진석 연구사는 "노비 중에는 이를 이용해 '집을 팔았는데 돈을 잃어버렸다'면서 집문서를 들고 도망친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땅 놀리면 뺏겨

18세기 서울에서는 빈 땅이든, 채소 과일 등을 가꾸는 포전(圃田)이든 주인이 2년간 땅을 놀리면 일반 백성이 집을 짓는 것을 허용했다. 이 때 땅 주인이 이를 막거나 헐어버리면 오히려 처벌을 받았다. 반대로 양반 중에서 이를 이용해 백성의 땅을 빼앗거나 돈을 뜯어내면 '전택침점'(田宅侵占) 벌로 다스렸다.

이밖에 조선의 왕 중에는 자식 사랑에 눈이 멀어 주택 관련 법을 어긴 경우도 있었다. 현종(재위 1660~1674)은 신하들이 "나라 돈을 모조리 써서 한꺼번에 다섯 공주의 집을 짓게 한다"며 거세게 반발하는데도 끝까지 버텼고, 숙종(재위 1674~1720년)은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신하들이 반대하는데도 기어이 규정보다 큰 집을 지어줬다.

안준현기자 dejav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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