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운동가 이오덕(1925~2003)은 ‘우리글 바로쓰기’(1989)라는 책에서 전래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햇님과 달님’)의 두 가지 텍스트를 부분 인용한 뒤 그 둘의 문체 차이에 눈길을 건넨 바 있다(상자기사 참조). 이오덕은 글 끝머리가 하나같이 ‘-다’로 맺어지는 이원수의 동화 문체와 달리, 시골 할머니 입에서 나온 문장은 ‘-거든’, ‘-드랴’, ‘-라구’, ‘-지’ 따위의 갖가지 말끝으로 마무리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글쓰기 교육가로서 이오덕은 시골 할머니 쪽을 편들었다. 말을 하듯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 ‘우리글 바로쓰기’를 꿰뚫는 지론이었으니 당연하다.
이오덕은 한국어 서술어의 평서형 종결어미를 ‘-다’의 독재에서 해방시키고 싶어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말의 형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오덕이 꿈꾼 것은 진짜배기 언문일치였다. 물론 여기서 언문일치란, 말이 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글이 말을 따르는 것이다.
생전의 이오덕이 누리망(인터넷)엘 자주 들어갔는지, 이른바 채팅이라는 것을 해보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누리꾼(네티즌)이었다면, 자신의 평생 꿈이 이상한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을 목격했을 것이다. 누리망에서는 글들의 끝머리가 ‘-다’의 독재에서 자주 풀려나 있으니 말이다.
그것은 전자우편이나 채팅이, 엄연히 문자행위이기는 하나, 입말에 가까운 문자행위라는 뜻일 테다. 그런데, 누리망의 언어는 한국어 입말의 가장 흔한 말끝인 조사 ‘-요’에서도 사뭇 놓여나 있다. 그것은 누리망의 글말이 규범적 표준적 입말보다도 외려 더 자유롭다는, 다시 말해 더 민중적이고 유희적이며 표현적이라는 뜻일 것이다.
누리망 언어의 말끝은(말끝만이 아니라 어휘 일반이 그렇기는 하나) 여느 한국어 ‘글체’와 다른 경우가 많다. 누리망 언어는 입말과 글말의 경계에 걸터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회방언은 여느 한국어 ‘말체’와도 다른 경우가 많다. 이미 확립된 입말조차, 그것이 표준어의 권위로 지나치게 거드름을 피울 땐, 누리꾼들의 존중을 받지 못한다.
누리망 글체 가운데 가장 ‘고전적인’ 것은 하오-체(體)일 것이다. 하오-체는 두 겹으로 고전적이다. 첫째는 이 글체가 누리망 언어에 매우 일찍 들어왔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다. 두 번째는, 말할 나위 없이, 이 글체가 (오프라인 공간에서도) 사극에서나 들을 수 있는 낡은 말투라는 점에서 고전적이다.
누리망 언어의 글체들이 대개 기존 형태를 비튼 것인 데 비해, 이 하오-체는 기존 형태를 그대로 두고 뉘앙스만, 다시 말해 위계적 의미만 살짝 바꾸었다는 점이 야릇하다.
누리망 바깥의 실제 세계에서 하오-체는 (비록 현대에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예사높임의 한 형태다. 그러나 이 글체가 누리망에서 채팅에 사용될 땐 그 위계의 뉘앙스를 잃고 중화돼 버리는 듯하다.
누리망 새말의 중요한 분만실 가운데 하나인 디지털 카메라 동호회 사이트 디시인사이드에 따르면, 하오-체는 “상대방을 배려함과 동시에 자신을 깎지 않는 오묘한 말투”다.
누리망에서 ‘님’이라는 표현이 대화자들 사이의 세속 위계에 무심하듯, 하오-체 역시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대화자들 사이의 위계를 평평하게 만든다. 그래서 40대 기업체 간부와 10대 고등학생이 버젓이 이런 대화를 나눈다.
“20년 전에 헤어진 앤(애인)을 어제 우연히 보았소! 꽁기꽁기했소(뒤숭숭했소).” “꽁기꽁기라니오? 차라리 므흣하게(기분좋게) 생각할 일 아니겠소?”
그러나 이 하오-체는 이제 누리망에서도 낡은 말투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이 글체가 표준어 화용 맥락에서 지니고 있는 신파 뉘앙스를 인터넷 공간이 충분히 막아내지 못했다는 뜻일 테다.
하오-체에 밴 장난기가 어느 순간 권태를 불러왔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저 하오-체의 양식화가 (이미 양식화한 여느 표준어 글체처럼) 누리꾼들에게 갑갑증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PC통신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리꾼들에게 가장 큰 힘을 행사하고 있는 글체는 표준어 해요-체의 여러 변형들이다. 누리꾼들은 존대를 나타내는 조사 ‘-요’를 ‘-여’, ‘-염’, -‘엽’, ‘-욘’, ‘-용’ ,‘-효’ 따위로 비틀어 변주하며 인터넷 글체에 다양성을 부여했다. ‘-요’와 마찬가지로 이 변형된 조사들도 평서, 의문, 명령 등을 가로지르며 사용된다.
그래서 누리망에서는 “안녕하세여?” “반가워염”, “쓸쓸해엽”, “죄송해용”, “빨리 해 주세욘!” “아파효?” 따위의 표현들이 예사로 사용되고 이해된다.
이오痔?이원수의 ‘햇님과 달님’을 인용하며 마땅찮게 여겼던 합쇼-체(‘-습니다’-체)는 누리망에서 어떤 꼴바꿈을 겪었을까? 이른바 하삼-체로 변한 듯하다. 누리꾼들은 “노력하겠습니다”라고 쓸 자리에 “노력하겠삼”이라고 쓰고, “재미있습니까?”라고 쓸 자리에 “재미있삼?”이라고 쓴다. ‘삼’을 ‘3’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공부 좀 하3!”(공부 좀 하십시오!)처럼 말이다. 그런데 이른바 이 하삼-체가 표준어 합쇼-체와 정말 대등한 위상을 지녔는지는 또렷하지 않다.
어떤 누리꾼이 “한 번 오삼!”이라고 썼을 때, 이 말은 “한 번 오십시오!”와 대등하게 들릴 때도 있고, “한 번 오세요!”와 대등하게 들릴 때도 있다. 그러니까 하삼-체는 ‘합쇼-체’와 ‘해요-체’ 사이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실상 누리망 공간은 합쇼-체에 맞먹는 아주 높임이 뿌리내리기 힘든 곳이다.
반면에 하삼-체의 원형이라 할 이른바 하셈-체는 해요-체 쪽에 한결 가까워 보인다. “커피 드셈”이라는 말은 “커피 드십시오”보다는 “커피 드세요” 쪽인 듯하다. 더 나아가, 이젠 관용구가 돼 버린 저주 표현 ‘즐 처드셈’은 (적어도 뉘앙스에서는) 명백히 해라-체에 가깝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화용 맥락이다.
어쩌면 하셈-체와 그 변형 하삼-체는 그 위상이 고스란히 포개져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둘 다 합쇼-체보다는 낮고, 해요-체와는 동위(同位)이거나 약간 위인 글체인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사회언어학적으로 이 둘은 거의 같은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통사론적으로는 이 두 글체의 값어치가 꽤 다르다. 하삼-체가 평서, 의문, 명령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데 견주어, 하셈-체는 명령(과 그 곁가지로서 청유)에 주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쉬고 싶어요”를 “쉬고 싶삼”이라고는 표현해도 “쉬고 싶셈”이라고는 좀처럼 표현하지 않는다.
또 “가셈”이라는 표현은 “가세요(가십시오)”나 “갑시다” 같은 명령이나 청유의 의미로는 쓰이지만, “갑니다(가십니다)”라는 평서의 뜻으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다. “갑니까?”라는 의문의 뜻으로도 잘 안 쓰인다. 물론 이 새로운 글체들에 대한 내 언어직관은 아직 또렷하지 않다.
내가 앞에서 ‘듯하다’ ‘-지도 모른다’ ‘거의’ ‘좀처럼’ ‘잘 안’ 같은 말로 조심스러움을 내비친 것도 그 때문이다. 어쩌면 이 새로운 글체들은 아직 제 문법을 완성하지 못한 채 형성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정도의 말 비틀기로 풀어버리기엔 누리꾼들의 권태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누리꾼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이름을 말끝으로 가져와 새로운 글체들을 개발해 냈다.
“강쌤 저나버너 아시나영?”(강 선생님 전화번호 아시나요?) 따위의 나영-체, “아, 그 놋북 레어로근영!”(아, 그 노트북컴퓨터 희귀한 거군요!) 따위의 근영-체, “맘 잡고 열공할 태희야”(맘 잡고 열심히 공부할 테야) 따위의 태희-체, “그 분이 오셨어요환”(쇼핑하고 싶어 죽겠어요) 따위의 요환-체, “엔터 키를 눌러BoA요”(엔터 키를 눌러보아요) 따위의 BoA-체 같은 것이 그렇다.
여기서 ‘-나영’ ‘-근영’ ‘-태희’ ‘-요환’ ‘-BoA' 같은 말끝들은 연기자 이나영 문근영 김태희, 프로 게이머 임요환, 가수 BoA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아무 이름이나 억지로 갖다 붙인 것은 아닌 것이, 대중 스타의 이름이 우연히 표준어 형태소(들)와 닮은 경우에만 그 이름들이 누리망 사회방언의 새 형태소로 채택됐다.
누리꾼들은 이오덕이 그리도 싫어하던 ‘-다’를 ‘당’이나 ‘돠’ 따위로 비틀기도 했다. “배고푸당”(배고프다), “나 그만 간돠”(나 그만 간다) 따위가 그 예다. 지하의 이오덕은 자신의 꿈을 ‘엽기적’으로 이뤄주고 있는 이 누리꾼들을 고마워할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말끝 ‘-다’의 독재를 지겹게 여겼던 것 못지않게 새말 만드는 유행을 꺼렸기 때문이다.
누리망에서 펄럭거리는 이 새로운 형태소들이 표준어 형태소와 누리망 바깥에서 힘있게 싸우기는 어려울 것이다. 누리망 언어는 근본적으로 하위문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사회방언들은 표준어의 압제에서 벗어나고 싶은 누리꾼들에게 자유의 공기를 실어 나르며, 그들끼리의 연대를 강화하며, 누리망 어느 곳에선가 꽤 오랜 시간 꿈지럭거릴 것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그러니까 아들 딸을 두고 인제 베를 짜러 갔거든. 베를 매주러 갔거든. 옛날에 베 무녕(무명) 짜구 베 짜는 그걸 매주러 갔거든. 그러니깐 하루 품씩 하루 품삯 받아 가지구서 인제 먹구 사는데, 한 날은 그 쌈(사람)네가 메물(메밀) 범벅을 쒀서 한 암박을 주드랴. 하나 주드랴. 가주 가서 아이들 주라구. 그래 이놈의 메물 범벅을 인제 이구선 오는데, 아 오다가 호랭이를 만났지.(1981년, 이야기한 사람--강화 김순이 81세)
●햇님과 달님
옛날 어느 시골 외딴집에 어린 아들 딸 두 오뉘를 데리고, 세 식구가 오손도손 살아가는 과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기들을 집에 두고, 이웃 마을로 남의 집 일을 해주러 다녔습니다.
어머니가 일하러 나가시고 나면, 어린 오뉘는 집을 지키며,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만 기다립니다. 단 두 남매가 집을 보고 있자니 무척 심심합니다. 그래 오빠는 누이동생에게 이야기도 해주고, 소꼽놀이도 같이 해주고 했습니다.(이원수, ‘옛날이야기’에서)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