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1학기 중간고사 독어시험을 치르고 있는 서울 H여고 2학년 교실. 시험감독 중인 K(독어) 교사의 얼굴에는 문제를 풀려고 끙끙대는 학생들처럼 초조한 기색이 역력하다.
“전문가 수십 명이 합숙하면서 만든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도 끝나고 나면 뒷말이 많은데 담당 교사 3~4명이 1~2일 만에 만든 문제가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괜히 엉터리 선생으로 낙인 찍히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중간고사 시즌을 맞은 고교 교사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달 10일 “이번 학기부터 각 교사의 정기고사 출제 문항과 채점 기준을 학교 홈페이지에 공개하라”는 내용의 공문을 각 고교에 내려보냈기 때문이다.
2008학년도 대입부터 학교생활기록부 성적 반영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정기고사의 객관성을 높이고 성적 부풀리기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일선 교사들이 느끼는 압박감은 상당하다. 자신이 낸 문제가 시중의 문제집에 수록된 것과 유사하면 표절시비가 일 것이 뻔하다. 또 출제한 문제에 오류가 있을 경우 인터넷 공간에서 삽시간에 ‘테러’ 수준의 자질시비가 퍼지게 될 것이다.
서울 S고 L(국어) 교사는 “출제 실수가 인터넷의 익명성 및 학생들의 교육 불신과 겹치면서 하루아침에 ‘개똥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출제 문항 공개에 대한 스트레스를 드러냈다. L 교사는 이번 중간고사 문제를 출제하면서 수십 개의 시중 문제집을 펴 놓고 다른 문제와 겹치지 않는지 일일이 확인해야 했다.
이 학교 K 교무부장은 “수업과 각종 학사업무도 힘에 부치는데 문제 개발까지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일선 교사들이 죽을 지경”이라며 “더 큰 문제는 사설학원들이 ‘OO고 기출문제 보유’ ‘내신 족집게 강의’ 등을 내세우면서 변칙 수업을 시작해 내신까지 사교육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점”이라고 우려했다.
교원단체도 문제 공개에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전국교직원노조 이민숙 대변인은 “이미 학생과 학부모 등 학교 구성원에게는 문제가 공개되고 있는데 인터넷에까지 문제를 공개하면 수업 내용과 출제 배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필요한 이의를 제기해 교육에 대한 불신이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관계자도 “출제문제 인터넷 공개제도는 교사들의 심리적 위축을 불러와 정당한 평가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반면 윤웅호 시교육청 중등교육 담당 장학사는 “시행 초기 다소 어려움이 있겠지만 내신성적에 대한 신뢰가 쌓이면 그것이 곧 교사들의 권위확보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고 해명했다.
대다수 학부모들도 이 제도를 환영하고 있다. 학부모 유인선(43ㆍ여)씨는 “그 동안 내신조작 사건 등으로 인해 내신성적과 관련해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며 “이 제도가 정착되면 부조리가 줄어들 것”이라고 기대했다.
유상호 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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