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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길 위의 이야기] 비와 꽃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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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길 위의 이야기] 비와 꽃 사이

입력
2006.05.03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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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집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가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져서 급히 돌아왔다. 잠깐 만에 도로 묶인 강아지가 구슬프게 낑낑거렸지만, 어쩔 수 없잖아, 젖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강아지 대신 우산을 데리고 다시 집을 나섰다. 강아지는 더 이상 조르지 않았지만 제 집에 들어가지 않고 비를 맞으며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배웅했다.

용산고등학교 울타리 너머 화단에서 라일락꽃이 빗물에 눅여진 향기를 보내왔다. 진달래와 벚꽃은 이미 다 졌다. 아카시아들이 어디선가에서 껌처럼 짙은 향기를 온 동네에 흩뿌릴 날도 멀지 않았다. 옛 수도여고 담장을 따라 느릅나무들이 조그만 연두빛 꽃잎들을 우수수 떨어뜨려 길바닥에 완두콩을 뿌려놓은 듯했다.

그깟 ‘벌금 100만원’이라는 듯, 경고문 아래 내다버린 쓰레기봉투들을 지나다가 비를 맞고 있는 꽃들을 잠시 내려다봤다. 벚꽃, 난초, 매화, 홍싸리, 뻔뻔할 정도로 화사했다. 자동차바퀴에 찢긴 검정 비닐봉지에서 쏟아져 나온 플라스틱 화투짝들이었다. 화투짝들은 왜 하나같이 꽃그림일까 생각하다가, 그러게 화투라지, 깨달았다. 그런데 화투의 12월은 ‘비’다. 왜 꽃이 아니고 비일까? 비도 꽃일까? 물의 꽃?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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