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는 사상 최고기록을 갈아치우고 있지만, 물가상승률은 거의 최저수준에 머물러 있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 유가폭등 상황이라면 오일 쇼크든,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와 물가급등이 함께 진행되는 상황)이든 물가 쪽에서부터 비상벨이 울려야 했겠지만,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6년여만에 가장 안정된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이례적 안정
1일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2.0% 상승에 그쳤다. 석유류 가격은 크게 상승(7.3%)했지만 기름값에 직접적 영향을 받는 공산품은 2.5% 인상에 머물렀다. 실생활과 직결된 농축수산물 가격은 3%나 떨어졌다.
한국은행이 금리결정근거로 삼는 근원인플레이션율(농산물 석유류 제외 물가)은 1.6%. 한은의 관리목표(2.5~3.5%)보다도 낮다. 통계로만 보면 사상 최악의 고유가 사태속에서도 ‘인플레압력’은 전무해 보인다.
●일시적? 혹은 구조적?
사실 주유소만 벗어나면, 고유가 공포를 느끼기란 쉽지 않다. 작년까지만해도 “국제유가가 배럴당 55달러를 넘으면 스태그플레이션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란 비관적 시나리오가 설득력을 얻었지만, 정작 60달러를 넘었는데도 아직 경제는 멀쩡하다.
‘이례적 물가안정’의 가장 큰 배경은 환율이다. 워낙 많이 떨어진 원ㆍ달러환율이 고유가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해주고 있는 것이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유가가 10% 뛰더라도 환율이 5%만 절상되면 소비자물가는 오히려 1% 떨어지는 것으로 분석됐다”고 말했다.
경제의 석유의존도가 낮아진 점도 있다. 통계청 한성희 물가통계과장은 “산업구조가 석유를 많이 쓰는 중화학공업 중심에서 정보기술(IT) 위주로 재편됨에 따라 제품가격에도 기름값의 영향이 줄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기에 수입개방으로 값싼 제품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대형할인점이나 인터넷쇼핑몰 같은 저가유통망이 보편화되면서, 과거와 같은 ‘고유가=인플레’의 공식이 구조적으로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유가를 언제나 버텨낼 만큼 한국경제가 물가안정체질을 갖춘 것은 아니다. 환율상승, 집값불안, 임금인상, 기상 및 자연재해 등 ‘인화(引火)성’재료는 얼마든지 잠복해있으며, 고유가와 맞물릴 경우 엄청난 물가폭발력을 낼 것이란 지적이다. 한은 관계자는 “하반기 물가는 지금 같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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