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주부 A(38)씨는 요즘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휴대폰을 사준 것을 후회하고 있다. 2년 전 사준 컬러 휴대폰을 6개월 전에 카메라폰으로 바꿔 줬는데, 또다시 100만원 가까이 되는 MP3폰을 사달라고 조르고 있다. A씨는 “한 달 용돈이 5만원인데, 휴대폰 요금이 5만원을 넘어 엄마에게 손을 벌리는 경우가 많다”고 푸념했다.
#2. 주부 K씨(45)는 아침에 남편과 아이들이 집을 나서는 순간, 디지털 쇼핑에 나선다. 리모컨으로 홈쇼핑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맘에 드는 물건이 나오면 바로 주문 전화를 건다.
불과 몇 시간 새 수 십만원 어치의 물건을 구입하는 경우가 흔하다. 최근에도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속옷과 진공청소기를 구입했다가 200만원이 넘는 카드대금이 청구돼 남편과 크게 다퉜다. K씨는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홈쇼핑을 보면 충동구매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전세계 정보기술(IT) 기업에게 한국 시장은 ‘테스트 베드(Test Bed)’로 불린다. 한국 소비자들은 첨단 제품에 대한 반응이 빨라 연구실에서 방금 개발이 끝난 최첨단 디지털 기기를 한국 시장에 가장 먼저 출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최첨단 디지털 기기를 가장 일찍 만난다는 게 소비자들에게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첨단 기기를 일찍 만난다는 얘기는 디지털 기기를 가장 빨리 교체해야 하고, 가장 비싸게 사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에서 디지털 기기 가격은 1년에 절반 씩 빠른 속도로 떨어진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2001년 593달러였던 DVD플레이어는 2005년 155달러로 내렸고, 디지털 카메라(2001년 368달러 → 2005년 135달러) 디지털 TV(2002년 4,000달러 → 2005년 1,316달러) 휴대폰(2000년 240달러 → 2005년 162달러) 등도 큰 폭으로 값이 내렸다.
한국 소비자들이 가장 비싼 디지털 기기를 가장 자주 교체한다는 점은 통계로도 확인된다. 국제 시장조사 기관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에 따르면 삼성전자 휴대폰의 국내 평균 판매가격은 지난해 4분기 41만3,000원이었지만, 수출 물량까지 합친 평균 판매가격은 185달러(약 18만원)에 불과했다.
LG전자와 팬택앤큐리텔 휴대폰도 내수 가격은 35만~40만원 선이지만, 수출용 휴대폰은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0달러(약 15만원) 안팎이다.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이 첨단 휴대폰만 선호하기 때문에 그만큼 비싼 값을 부담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첨단 기기를 좋아하는 만큼 교체주기도 빠르다. 한국전자산업진흥회는 우리나라 소비자의 PC 교체주기는 3년 전만 해도 4년 정도였으나, 최근엔 2.5년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디지털 TV(5년)와 디지털 카메라(2~3년)의 교체주기도 외국보다 1~2년 빠르다. 진흥회 관계자는 “외형적이고 과시적인 것을 중시하는 우리 소비자들은 첨단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 교체주기도 외국보다 훨씬 짧은 편”이라고 분석했다.
디지털 혁명은 한국인을 ‘못 먹고 못 입어도, 통신 네트워크에는 접속해야 하는’ 존재로 만들었다. 총 소비에서 식료품이 차지하는 비율인 엥겔계수는 지금까지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별하는 대표 지표의 역할을 해왔다. 식료품은 소득 수준에 관계없이 반드시 얼마만큼은 소비해야 하는 필수품목인 탓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통신비가 부자와 빈자를 가려내는 지표 역할을 하고 있다. 가난한 사람도 인터넷과 휴대폰 등 디지털 통신망에 접속하기 위해 매달 수입의 10% 이상을 지출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은 새로운 결제수단과 구매통로를 만드는 방법으로 충동구매와 과소비를 조장하고 있다. 새로운 결제수단은 전화결제 시스템이고, 구매통로는 홈쇼핑ㆍ인터넷이다. 휴대폰으로 물건을 외상 구매하는 전화결제 규모는 2000년 약 30억원 수준에서 2005년에는 1조원(무선전화 8,000억원ㆍ유선전화 2,400억원)을 넘어섰다. 이 가운데 약 40%는 연체로 연결된다.
버튼만 누르면 물건을 살 수 있는 TV홈쇼핑과 인터넷 쇼핑은 충동구매의 주범이다. 지난해 전자상거래와 관련해 한국소비자보호원에 접수된 2만5,141건의 상담 중 52.5%(1만3,205건)가 충동구매에 따른 계약 해제ㆍ해지 건이었다. 시장 규모가 연간 5조원 가량인 TV홈쇼핑의 충동구매에 따른 반품 규모도 약 1조원에 달한다.
소보원 관계자는 “국내 여성 소비자 3명 가운데 1명은 거의 매일 TV홈쇼핑을 시청하는 쇼핑 중독증 환자들”이라며 “종일 TV나 인터넷을 보면서 별 생각 없이 충동구매 했다가 경제적 능력 때문에 뒤늦게 반품을 요청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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