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북부 가르왈 히말라야에 난다 데비 성역(Sanctuary)이라는 곳이 있다. 풍광이 수려하고 신의 기운이 서려 있어 예로부터 힌두교의 순례자들이 꿈에 그리던 이상향이다.
인도 최고의 영산으로 꼽히는 난다 데비(7,818m)를 비롯하여 트리술(7,120m), 두나기리(7,066m), 창가방(6,866m) 등 히말라야의 거봉들이 마치 병풍처럼 에워싼 가운데 온갖 기화요초들이 만발해 있어 ‘히말라야의 정원’이라 불리울 만큼 아름답다. 덕분에 순례자 못지않게 이곳에 이르기를 꿈꾸어왔던 것은 다름 아닌 산악인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오랫동안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발생한 중국과 인도 간의 국경분쟁 때문이다. 분쟁이 일단락되면서 이 지역이 순례자 및 산악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한 것은 1974년의 일이다.
이후 다시 성역을 폐쇄하게 된 1983년까지의 9년 동안 이 지역에서는 세계 등반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 등반들이 여럿 이루어졌다. 가장 먼저 거론해야 될 것은 물론 크리스 보닝턴의 창가방 초등이다. 그는 하얗게 얼어붙은 수직의 서벽을 보고는 기가 질려 남동릉 쪽으로 에도는 루트를 개척한 끝에 세계 최초로 이 산의 정상에 올랐다.
1975년에는 돈키호테 같은 원정대가 출현했다. 조 태스커(1948~1982)와 딕 렌쇼, 단 두 사람 만으로 이루어진 두나기리 원정대였다. 당시만 해도 단 두 사람이 히말라야 거벽 등반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이들은 등반 대상지에 접근하는 방식부터 남달랐다. 전세 낸 고물 자동차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을 가로질러 그곳까지 간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비행기 삯이 없어서 였다. 이를테면 히말라야 거벽 등반계에 히피가 출현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어처구니 없는 짓이라며 고개를 가로 젖던 기존 산악계의 폄하에도 불구하고 끝내 두나기리의 정상에 올라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하산 도중 정신착란을 일으켜 차라리 죽기를 갈망하기까지 했던 조 태스커는 그러나 고국 영국에 돌아와서도 눈 앞에 아른거리는 또 다른 산을 잊지 못했다. 바로 크리스 보닝턴이 에돌아갔던 창가방 서벽이다. 조 태스커는 동상 때문에 당분간 등반을 할 수 없게 된 딕 렌쇼 대신 새로운 파트너를 찾는다.
1975년 에베레스트 남서벽 원정대의 최연소 대원 피터 보드맨(1950~1982)이 단연 눈에 띄었다. 이제는 마치 한 사람의 이름처럼 통용되는 ‘보드맨-태스커’ 콤비는 그렇게 탄생되었다. 그들이 단 두 사람만의 힘으로 창가방 서벽을 오르겠다고 하자 크리스 보닝턴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어리석은 짓이야. 만약 성공한다면 그곳은 히말라야에서 가장 어려운 곳이 될 걸세.”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보드맨-태스커는 그곳에 올랐다. 그야 말로 경천동지할 사건이다. 그들이 택한 등반 대상 자체가 당시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는 것이었다. 창가방의 별명은 ‘빛 나는 산’이다. 정상 부위가 온통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까닭이다. 그 화강암 위에 눈과 얼음이 엉켜 붙어 마치 유리로 된 조각품인양 눈부시게 햇볕을 반사해낸다. 무엇보다도 그곳은 해발 7,000m에 육박한다. 제대로 숨을 쉬는 것조차 버거운 높이다.
한 마디로 그곳은 ‘인간이 오를 수 없는’ 벽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산을, 마치 집 뒷산에 소풍이라도 가듯, 최소한의 장비만을 사용하여 단 두 명만의 힘으로 오른 것이다. 히말라야 등반사에 새로운 지평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다.
보드맨-태스커는 그 이후에도 필생의 파트너로서 숱한 산을 함께 오른다. 1978년 K2, 1979년 캉첸중가, 1980년 다시 K2, 1981년 콩구르. 그리고 1982년 당시까지 미답 루트였던 에베레스트 북동릉에 도전하였다가 살아서 내려오지 못했다. 서로 태어난 날은 달랐으나 한날 한시에 삶을 마감한 것이다.
그렇게 피터 보드맨은 32년, 조 태스커는 34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 갔다. 하지만 그들의 등반과 삶은 이후 세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전혀 새로운 등반 방식을 주창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것 이외에도 자신들의 모든 등반을 빼어난 산악문학으로 정리해놓았기 때문이다.
피터 보드맨의 ‘창가방 그 빛나는 벽’은 1979년 존 레웰린 라이 기념 산악문학상을 수상하여 현대 산악문학의 고전이 되었다. 조 태스커의 ‘에베레스트, 잔인한 길’은 신세대 산악인들의 도저한 개척정신을 잘 보여준다. 두 사람 각각의 유고집인 ‘성스러운 정상들’과 ‘세비지 아레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였던 그들 최후의 모습을 감동적으로 증언한다. 이 네 권의 저서들은 훗날 ‘보드맨-태스커 전집’이라는 두툼한 책으로 묶여 전세계 산악인들의 서가 한 모퉁이에 든든히 자리잡고 있다.
이들은 평생 극한 등반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마치 ‘죽음의 예찬자’인 듯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이들은 누구보다도 삶을 사랑했다. 다만 그 삶을 치열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다.
조 태스커는 자신이 맞게 될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나는 위로받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나는 내가 가진 모든 힘과 활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을 테니까. 만일 내가 위험한 상황까지 나를 몰고 가지 않았다면, 등반에 내 모든 것을 연관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사랑 받지도 미움 받지도 못하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어버리고 만다.”
산악문학작가
■ 보드맨-태스커 산악문학상
빼어난 산악문학도 남겨… '등반 명콤비'여 영원하라
이들의 등반 활동과 창작 활동을 기리기 위하여 ‘보드맨-태스커 산악문학상’이 제정된 것은 1983년이다. ‘산악문학에 현저한 기여를 한 창작품의 (공)저자’에게 주어지는데 상금은 2,000 파운드이며 픽션과 논픽션 그리고 연극대본이나 시까지도 포함한다. 실제로 그 동안 본선까지 진출했던 작품들의 면모를 뜯어보면 전기나 평전, 장편소설, 단편소설, 원정대 보고서, 자서전, 등반사학, 등반철학, 대담집, 에세이, 가이드북 등 산악문학의 전분야를 망라하고 있다.
제정 첫해에는 당선작을 내지 않았으나 그 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매년 당선작을 발표하는데 현재는 전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산악문학상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 동안 본선에 진출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영국이나 미국 이외에도 네팔이나 인도 등 전세계 12개국 이상의 나라에서 집필된 것들이니 ‘국제적’ 문학상임에는 틀림없지만 응모자격 중에는 ‘영어로 쓰여진 작품’이라는 제한조건이 있다. 비영어권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하더라도 영어로 번역하여 출품할 수 있다. 역대 수상작들 중 국내에 소개되어 있는 것은 정광식이 번역한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 단 한권 뿐이다.
전세계의 산악인 혹은 산악문학 작가들은 이 상의 본선에 진출했다는 것 자체를 하나의 명예로 받아들인다. 그것은 곧 보드맨-태스커라는 두 걸출한 산악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경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 아름답고 명예로운 상이 존속하는 한 그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그들의 등반과 창작은 이 상을 낳았고, 이 상은 다시 새로운 세대의 등반과 창작을 고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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