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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속에 버려진 청각장애인들/ (중) 부실한 농아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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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속에 버려진 청각장애인들/ (중) 부실한 농아교육

입력
2006.04.27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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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 가능 교사 크게 부족… '不通교실'

서울 A농학교에 재학중인 이모(17)군은 농학교를 다닌 지 벌써 10년째지만 신문을 읽기가 힘들다. 문장이 두세 줄 이상 길어지고 어려운 한자말이 나오면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 읽어도 뜻이 이해되지 않는다.

글쓰기도 신통치 못하다. ‘나는 학교 속에서 축구를 하여서 땀을 흘리면 식당에게 가면 콜라를 한 병가 주세요’하는 식이다. 문장이 조금만 길어지면 조사와 어미의 활용이 엉망이 된다.

자릿수가 높거나 분수가 들어가는 곱셈 나눗셈 등 또래 청소년들에게는 어렵지 않은 문제도 풀기가 쉽지 않다. 이 군의 성적은 20여명 중 중간 수준. 그는 “개인적인 학습 능력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선생님 대부분이 간단한 수화밖에 하지 못해 가르치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수화 못하는 교사들

농아인들은 자신들이 사회적 장애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적 이유가 잘못된 농교육(聾敎育)에 있다고 말한다. 한국농아인협회 변승일 회장은 “농아인들의 모국어는 수화인데, 농아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대부분이 수화를 못 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전국 18개 농아인 학교에서 일하는 약 1,000여명의 교사 중 수화가 능숙한 선생님은 50여명 미만, 한 학교에 2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는 장애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특수교육 자격증 소지자를 교사로 뽑아 순환 배치하는 제도 때문이다. 교육부 특수교육정책과 관계자는 “현재는 농아학교만 분리해 따로 (수화가 능한) 교사를 채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라며 “제도 개선과 예산 뒷받침이 따라야 한다”고 밝혔다.

학교 교실에서조차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이 안 되니 수업은 파행적으로 운영될 수 밖에 없다. 현재 대부분의 농학교 수업이 소리말과 간단한 수화가 뒤섞인 형식으로 진행된다. 농아인 김모(21)씨는 “이 때문에 말귀가 트인 후천성 농아나 몇몇 특출한 학생들을 제외하면 수업 내용을 이해하기가 어렵다”며 “하루 종일 시간만 때우고 마는 학생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농아교육에 대한 불신 팽배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자녀를 농학교에 보내지 않으려는 농아 부모들이 많다. 교육부 통계에 따르면 전체 농아 학생 2,549명 중 35%에 이르는 879명이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다. 간혹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 대학에 진학하는 농아인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구술 중심의 수업을 따라가지 못한다.

한국농아대학생연합회측은 “장애인 특별 전형을 통해 청각장애인 대학생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지만, 학교에서는 이들을 위한 수업 내용 대필 서비스나 시각 교재 마련 등에 소극적”이라고 밝혔다. 결국 농아인들의 열악한 교육 현실은 이들의 운명을 얽어 매는 족쇄가 된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지식이 뒷받침되지 못하니 육체노동 외엔 할 것이 없다”며 “낮은 교육 수준이 저소득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농아인들은 사회의 최하계층으로 밀려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수화통역사는 331명에 1명 꼴

‘수화가 능숙한 사람을 교사로 채용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일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수화통역사의 수는 총 693명으로 농아인 331명당 1명 꼴에 불과하다.

장애인 선진국인 핀란드의 경우 100명당 1명, 일본과 미국의 경우 150명당 1명 꼴인 것과 비교하면 줄잡아 1,000여명의 수화통역사가 모자란 상황이다. 따라서 수화통역사 양성이 시급하지만 국내의 수화통역사 전문 양성 기관은 천안 나사렛대학교의 수화통역과가 유일하다.

통역사 부족으로 인한 문제는 농아인의 생활 도처에 깔려있다. 한 농아인은 “직장에서 수화 통역이 안되다 보니 고용주ㆍ동료와 인간 관계가 형성이 안돼 ‘조직문화를 해친다’며 쫓겨나는 사례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수화가 서툰 사람의 오역으로 인한 피해도 흔하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는 병원과 관공서에 전문 수화통역사의 배치를 의무화 하고, 경찰 조사나 법원 재판에서 농아인의 진술을 들을 때는 2명의 수화통역사를 두도록 하는 등 다양한 안전장치를 두고 있다.

한국농아인협회 관계자는 “현재 우리나라 사정으로는 수화통역사가 절대 부족하기 때문에 이런 서비스는 꿈도 못 꾼다”며 “정부가 장애인복지차원에서 수화통역사를 양성할 수 있는 전문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 농아인과 건청인의 문화적 차이/ '노크' 안했다고 오해마세요

농아인과 건청인 간에는 문화적 차이가 있다. 예컨대 건청인들은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걸거나 관심을 끌기 위해 소리를 내지만, 농아인들은 손짓을 하거나 가벼운 몸 터치를 한다. 건청인들은 이러한 농아인의 행동을 자신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소리가 없는 환경을 상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화할 때 표정이 풍부한 것도 농아인들의 특성이다. 얼굴 표정이 수화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수화통역사들은 “부사ㆍ형용사의 기능을 얼굴 표정이 대신한다”고 말한다. 손짓에 얼굴 표정을 더함으로써 수화의 표현력이 극대화 된다. 그러나 건청인들은 이러한 면을 보고 ‘농아인들은 감정 변화가 심하다’는 식의 편견을 갖기 쉽다.

건청인들은 화장실처럼 개인적인 공간에 있을 때 노크하는 것을 에티켓으로 여긴다. 하지만 농아인들은 노크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바로 문을 연다. 건청인은 이 같은 농아인의 행동이 불쾌할 것이다.

운전을 할 때 농아인들은 경적 대신 불빛이나 수신호로 의사를 표현한다. 건청인들은 이를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농아인이 운전하는 차량에 경적을 울렸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자신을 무시한다’며 화를 내게 된다.

농아인과 건청인의 사회는 사실상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문화적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건청인들이 먼저 농아인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려 하지 않으면 농아인들의 고립감은 더욱 더 깊어질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철환기자 ploma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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