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반(反)문화의 아이콘인 록그룹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 ‘혁명을 팝니다’(원제 The Rebel Sell)는 1994년 그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 코베인은 60년대 히피조차 얼치기로 보았을 만큼 주류 문화에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었다. 펑크, 그런지록 등 그가 추구한 얼터너티브 음악은 대중영합을 경멸한 자유정신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너바나의 앨범은 엄청난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나는 반문화 상품을 팔아 주류가 된 것이 아닌가?’ 딜레마는 끝내 그를 자살로 몰아넣었다. 커트 코베인을 누가 죽였냐고? 그가 스스로를 죽인 것이다. 저자들은 단정한다. 반문화는 현실 가능성이 없는 신화이며, 코베인은 그 잘못된 신념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철학적 문화비평서답지 않게 도발적인 도입부는 책의 논지를 정확히 압축한 것이다. 60년대 이후 현실의 질서에 맞서온, 나아가 좌파 정신의 지배적 조류를 형성해온 반문화는 결코 혁명적 독트린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자본주의를 추진해온 동력이기까지 하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저자들은 지금껏 반문화가 어떤 변화도 가져오지 못한 것은 그 바탕의 사회이론이 허구이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당혹스럽지만 사회 억압구조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반문화적 표상이 거꾸로 시장에서 성공적 상품이 돼온 사실은 부인할 도리가 없다. 일상의 예만 해도 장발, 미니스커트, 비키니, 록, 펑크, 레게, 랩, 서핑, 피어싱, 찢어진 청바지 등 다 꼽을 수조차 없다.
대량생산, 대량소비 사회에서 남과 다른 뭔가(요즘 식으로 말하면 ‘쿨’하다는 것)를 추구하는 욕구를 반문화가 충족시켜 왔다는 것이다. 소비적 자본주의 질서에 항거하는 반문화가 도리어 가장 진정한 자본주의 정신을 반영한다는 역설이다.
18세기 낭만주의에서 배태된 반문화 개념은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에 프로이트의 욕망ㆍ심리이론이 결합하고, 20세기 파시즘과 냉전 경험이 더해지면서 사회구조 전체가 억압과 순응의 기제라는 확신으로 굳어졌다는 것이 이 책의 진단이다.
질서는 억압과, 무질서는 자유와 동등하다는 식으로 단순화시킨 개념이 모든 질서와 규칙을 없앤 ‘자생적 조화’의 삶이라는 반문화의 이상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여기서 현대 사회체계가 전복되지않는 한 모순 해결의 방도는 없으며, 획일성에서 벗어나 참다운 삶을 추구할 수도 없게 된다.
저자들은 반문화주의자들의 잘못은 삶의 규격화, 획일성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하고, 이것들이 자발적 합의로 생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데 있다고 본다. 또 남과 다르게 보이고 싶은 소비의 경쟁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해 모두가 자본의 의도에 휘둘리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제가 틀린 만큼 세계를 바꾸기 위한 실질적 정치프로그램이나 더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함은 당연하다.
결국 문제는 체제가 아니라 체제 내 허점이므로, 현실적 해결책은 민주적 정치 과정을 통해 논쟁하고, 조사하고, 법률ㆍ규칙을 통해 개선을 도모하는 것이다. 저자들의 주장은 ‘현대의 위기는 문화의 지양(반문화의 추구)이 아니라, 삶의 구체영역에서 실천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는 하버마스의 입장을 명백히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책은 이를 입증키 위해 철학, 경제학, 심리학 등의 탄탄한 이론적 바탕을 깔고 대중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종횡으로 누비며 반문화를 구성하는 무정부주의자, 진보적 좌파, 환경론자, 반세계화주의자들을 공격한다.
읽기가 만만치 않은데다, 저자들의 주장이 현상유지, 체제옹호의 논리로 읽히는 불쾌감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막연히 동경하는 반문화 또한 허상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드문 책이라는 점만으로도 가치는 크다. 캐나다 철학자로 펑크밴드 경험이 있는 저자 히스는 토론토대에, 역시 다양한 사회경험을 가진 포터는 몬트리올대에 각각 재직 중이다.
이준희 논설위원 jun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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