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치병이나 출생의 비밀 따위가 버무려져 더 애틋한 순백의 첫사랑. 지난 10여년간 한국 드라마계를 주름 잡으며 ‘겨울 연가’ ‘천국의 계단’으로 대표되는 한류 드라마 열풍을 빚어낸 동력은 단연 운명적 첫사랑의 판타지였다. 하지만 너무 우려먹은 탓일까. 요즘 첫사랑의 판타지를 다룬 드라마들은 HD(고화질)로 곱게 치장해 겉모습은 한층 ‘판타스틱’ 해졌지만 스토리면에서는 참신한 변주에 실패하고 자기 복제를 거듭하며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빛 바랜 첫사랑의 판타지 - '봄의 왈츠' '천국의 나무'
‘겨울 연가’의 윤석호 PD와 ‘천국의 계단’의 이장수 PD가 각각 한국 드라마의 대표 브랜드인 ‘계절 연작’과 ‘천국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선보인 ‘봄의 왈츠’(KBS2)와 ‘천국의 나무’(SBS)가 대표적인 예다. ‘봄의 왈츠’는 여성들이 얼굴만 바라봐도 행복해진다는 다니엘 헤니까지 합세했지만 시청률은 같은 시간대 지상파 3사 드라마 중 가장 낮을 뿐 아니라, 방송 초반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천국의 나무’도 시청률 한 자릿수를 맴돌다 종영했다.
연출가의 명성에 비하면 실패나 다름없는 두 작품이 부진을 보이는 이유는 진부한 설정과 뻔한 스토리. 일본의 한류 시장을 겨냥한 기획 의도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한국 드라마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결과다. ‘봄의 왈츠’는 어린 시절의 운명적 사랑 등 ‘계절 연작’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천국의 나무’는 아예 한 발 더 나가 일본에서 큰 인기를 모은 전작 ‘천국의 계단’의 아역 남녀 주인공을 연기한 이완, 박신혜를 캐스팅 한 것은 물론, 내용 면에서도 전작의 열기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는 “운명적인 사랑도 스토리에 따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는데, 최근에는 한류 시장을 노려 ‘겨울 연가’ 비슷한 작품만을 만들어 국내에서는 경쟁력을 상실했다”고 말했다.
"사랑이야기도 리얼한 게 좋아" - '연애 시대' '굿바이 솔로'
첫사랑 판타지가 밀려난 자리에서 점점 힘을 얻고 있는 것은 현실적인 사랑을 다룬 작품들. 남녀의 연애 심리를 파헤치는 MBC 시트콤 ‘소울 메이트’는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라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관심의 대상이 됐고, 동거와 혼전 관계 등을 거리낌 없이 묘사하는 KBS2 ‘굿바이 솔로’는 마니아 드라마로 탄탄한 팬층을 확보했다.
이혼 후 다시 시작하는 사랑을 그린 SBS ‘연애 시대’는 ‘영화 같은 드라마’라는 호평까지 얻고 있다. 이들은 극 진행에 특별한 사건을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기존 트렌디 드라마와 차별화된다. 불치병 같은 작위적 설정도 없다. 대신 섬세한 일상 묘사를 통한 현실성의 확보에 주력한다.
드라마가 사랑의 ‘운명론’대신 ‘현실론’으로 선회한 것은 주 시청자층인 20~30대 여성들의 감수성이 변했기 때문이다. ‘섹스 앤 더 시티’ 등 해외 TV시리즈를 즐겨보고 일상의 심리 묘사에 집중하는 일본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은 드라마에서도 아름답지만 손에 닿지 않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에서도 있을 법한, 그래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 점수를 준다.
판타지와 현실의 조화 찾아야
하지만 현실적인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들이 대세가 됐다고 하기엔 아직 이르다. ‘연애 시대’, ‘굿바이 솔로’ 등의 시청률은 10% 중반대에 머물고 있다. 한 방송사 관계자는 “방송사로서는 중장년층이 그냥 보고 마는 드라마가 시청률 30%를 넘는 것 보다는 좋아하면 기꺼이 지갑을 열 수 있는 20~30대가 즐겨보는 드라마에서 20% 시청률이 나오는 것이 더 이익”이라며 “하지만 더 큰 히트를 노리려면 여전히 ’파리의 연인‘이나 ‘내 이름은 김삼순’같은 작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남녀 노소를 모두 잡는 ‘국민 드라마’가 되려면 재벌 2세와 신데렐라 같은 설정에다 요즘의 연애 심리를 반영해 살짝 변화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사랑을 담은 드라마들이, 드라마 하면 재벌 2세와 출생의 비밀을 먼저 떠올릴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국내 드라마의 흐름에 변화를 주는 촉매제 역할을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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