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총선을 석 달 앞둔 1996년 1월까지만 해도 집권당인 신한국당이 얻을 수 있는 의석은 110석 안팎에 불과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김영삼 정권의 실정과 지역분열로 인한 민심이반은 그만큼 심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신한국당은 139석을 얻어 원내 과반수(150석)에 근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민련과 무소속 의원을 끌어당겨 과반 정당이 됐다.
그것은 ‘가면(假面) 선거’ 덕이었다. 당시 대중 지지도 1,2위를 달리던 이회창, 박찬종씨에다 맹형규 홍준표 안상수 등 새 인물을 대거 입당시켜 그들의 이미지로 정권과 당을 가렸고, 대중은 거기에 잠시 혹했다.
정권은 그간의 실정을 잊고 다시 오만해졌다. 같은 해 12월말 새벽 여당 의원들을 국회에 불러모아 야권이 극렬 반대하던 노동법 개정안 처리를 밀어붙였고, 당 대표라는 사람은 “자랑스러운 일을 했다”고 했다.
착각과 무리수의 결말은 참혹했다. 대통령 아들의 비리 등 악재가 겹치기는 했지만, 이를 분수령으로 정권이 급속 쇠락했다는데 이론이 없다. 김영삼 대통령은 한자릿수 지지율로 임기를 마감했다.
소속 의원을 100명 이상 거느린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서울시장 후보감 하나 없어 밖에서 사람을 데려온 것은 양당이 그 동안 잘못했다는 뜻이다. 당이 국민의 마음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의원도 인기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은 후보를 들여오기 전에 반성부터 하는 게 순서다. 지금까지 이러 이러한 것을 잘못했으니, 선거 후엔 이렇게 바꾸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잘못했다는 당은 없다. 상대 당에 대한 손가락질만 난무한다.
국정을 책임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당의 태도가 더 뻔뻔스럽다. 낮은 당 지지율이 현 주소를 말해주고 있는데도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의 인기에 숨는 얕은 꾀로 요행수를 노리고 있다. 그것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을 만큼 염치도 없다. 대표적인 게 우리당과 강 전 장관의 ‘거리 두기’ 전략이다. 어떤 당직자는 “강 전 장관이 당을 비판할 테니 잘 보이게 써 달라”고 부탁을 하고 다녔다.
강 전 장관은 “나는 분명 여당 당원”이라며 ‘거리 두기’를 부인하면서도, 여권 핵심부의 기류와 다른 민감한 발언을 연일 쏟아낸다. “노 대통령과는 개혁을 하는 방법이나 생각이 많이 다르다”고 했고, “강남 시민의 마음을 다치게 하는 것은 잘못” 이라며 ‘편가르기’ 정책을 꼬집었다. “기사 하나 하나에 대립 각을 세우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는 말도 했다. 언뜻 들으면 야당의 질타 같다.
우리당이 ‘지방권력 심판’을 들고 나온 것도 몰염치다. 정권 임기 중 실시되는 전국단위 선거의 의미는 첫째가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다. 이를 쏙 뺀 채 한나라당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자치단체장의 비리와 무능 뒤에 숨어 얼렁뚱땅 선거를 치르겠다는 게 우리당의 심산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당이 선거에서 승리하거나, 최소한 한나라당과 균형을 이룬다면 국민은 지난 3년간 정권의 모습을 또 봐야 할 것이다. 선거 결과가 좋은데 무슨 반성과 변화가 필요할까. 한나라당이 이미지 선거, 반사이득의 승리를 과대포장 하는 것을 보는 것은 고역이겠지만, 우리당의 오만은 집권 말기에 어떤 결말을 부를지 헤아릴 수 없어 두렵다.
유성식 정치부 차장 ssyoo@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