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사 영향력 조사에서 늘 1등을 차지하는 기관이 KBS다. 이 기관의 사장 임기 만료가 두 달여 앞으로 다가오자 벌써부터 하마평이 분분한 모양이다. 관련 단체나 타 언론사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이들의 관심과 고민이 순수하고 진지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최근 KBS 노조가 전 직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차기 사장 관련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고 많은 신문들이 이 결과를 크게 다루었다. 응답자의 82.2%가 현 정연주 사장의 연임에 반대하고 있다는 결과는 방송사에 대해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는 신문사들, 특히 현 KBS 체제에 대해 적극적 반감을 가지고 있는 보수신문들에게는 먹음직스러운 기사거리였으리라. 그런데 조사연구에 관한 기사의 기본은 조사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혹시 숫자 속에 숨은 진실이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연구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했는가?
KBS 노조는 사내 전자게시판을 통해 여론조사 참여를 촉구하는 글을 올렸는데, 그 내용의 상당 부분이 정연주 사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었다. 문제가 있으니 조사에 응해달라고 한 후 문제가 있느냐고 물은 셈이다. 설문지에서는 전임 사장의 잔여 임기 두 달을 한 임기로 간주하여 정 사장의 ‘3회 연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틀린 말이야 아니지만 정확한 조사용 질문은 아니다. 경영직과 기술직은 71%(1,945명)가 응답한 데 반해 기자와 PD는 46%(762명)만이 답했다. 실제로 정 사장에 대해 우호적인 젊은 일선 PD들은 설문조사 자체에 대해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조사과정의 허물이 없었다 하더라도, ‘조직 결속력’과 ‘후생복지’ 등의 문항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은 반면 ‘프로그램 경쟁력’과 ‘자율성, 민주성’에 대해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대부분 신문들은 노조의 조사결과를 그대로 ‘받아쓰는’ 정도에 그쳤다.
조사결과에 대한 무비판적인 받아쓰기는 ‘신문의 날’에도 있었다. 신문협회가 발표한 독자 조사결과를 기사화하면서, 거의 모든 신문이 “세상 정보 어디서? ‘신문’이 73% 1위”같은 제목을 뽑았다. 그러나 이 조사는 꽤 열심히 (주 3회 이상) 신문을 읽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한 조사다.
마치 한국인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한국이 국가 인기 1등이더라며 뿌듯해 하는 꼴이다. 또 있다. 최근 영남일보는 대구 경제 회복에 가장 적합한 후보가 열린우리당 이재용 후보로 나타났다는 기사를 실었다. 그런데 설문지를 보면, 응답자가 선택할 수 있는 보기에 열린우리당 후보 1명과 한나라당 후보 3명이 한꺼번에 있다.
한나라당 예비후보 셋을 선택한 응답의 합이 열린우리당 후보보다 훨씬 높은 상황에서 “이재용 1등”이라는 제목을 달 수는 없는 일이다. 조사보도의 기초도 모르는 기사이거나 의도적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대구 여론조사 관련 내용은 4월 13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를 참조했다).
다시 KBS 사장에 대한 보도로 돌아가 보자. KBS 노조의 조사결과 중 정 사장이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가 부족하고 정치ㆍ자본으로부터의 독립도 악화했다는 내용이 있다. 누가 사장이 되든 새겨들을 부분이다. 문제는 이런 문제들을 차근차근 분석해준 신문은 없다는 점이다.
조선일보는 KBS가 “정신 나간 짓”을 해왔고, 이제 KBS를 “광적 인간들의 손아귀에서 되찾아 국민에게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사설을 통해서다. 신문의 얼굴인 사설을 이렇게 품격 없는 비방으로 채울 수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중요한 것은 현 KBS 사장의 개인적 미래가 아니다. KBS의 미래가 중요하고 한국 방송과 한국 언론의 미래가 중요하다. 그 방향을 정하는 과정에서, 경쟁사이자 동업자인 타 언론사들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비판과 충고를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3년 동안 KBS가 어떤 성과를 이루고 우를 범해왔는지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우선이다. ‘정신 나간’ 받아쓰기나 ‘광적’ 마녀사냥은 더 이상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연세대 영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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