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초 한 대학의 정치학개론 개강 강의실. 으레 참고문헌 나열해주고 시간 때우겠거니 생각하던 신입생들에게 교수는 말했다. “여러분, 정치학 혹은 정치가 뭔지 알고 싶거든 교과서 열 권 읽는 것보다 소설 한 편 읽는 게 나을 거요.” 그가 권한 소설이 이병주(李炳注ㆍ1921~1992)의 ‘지리산’이었다. 그 교수 말대로 행태주의니 기능주의니 하는 서구이론으로 도배된 교과서 백날 읽어봐야 당시의 한국 정치현실은 절대로 해석되지 않았다.
지금이야 보수언론이 정권 보고 대놓고 좌파라 하고 대통령 씹는 게 국민스포츠가 됐다는 시대지만, 당시 그 신문들은 아무리 들여다봐야 ‘고위층’이니 ‘의중’이니 하는 모호한 소리들만 가득 차 있었다. 이병주가 1972년부터 쓴 ‘지리산’은 그런 시절에 최초로 빨치산을 주인공으로 이념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실제 작가 자신과 실존인물들의 체험에 바탕한 사실성, 작가의 비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인생관이 특유의 호방한 문체로 직조된 대작이다.
언론인 출신답게 마치 기자가 마감시간에 쫓기듯 “세상에 (시간에) 쫓기어 나오지 않은 명문은 없다”며 많게는 하룻밤에 원고지 200장, 한 달 평균 1,000여장 가까이 문제작들을 쏟아내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이병주는 그러나 사망 이후 까맣게 잊혀져버렸다. 수년 전 왜 이병주를 평가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한 진보적 문학평론가는 “문학사적 가치가 없다”고 잘라 말했고, 한 출판사 대표는 “누군가 그의 전집을 내긴 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만인보’의 고은 시인은 시 ‘소설가 이병주’에서 그를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 멜로드라마로 그리는 사람/ 이데올로기를/ 이데올로기 추억으로 노래하는 사람/… /그의 소설들은/ 언제나 과거/ 언제나 현실이되/ 현실인 양/ 비현실적인 회한의 반동이었다’고 했다. 이병주는 우리사회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모두에서 금기가 돼 있었다. 여러 곡절 제쳐놓고, 문학적 성과 여부보다는 사망 직전 그의 5공 정권을 옹호한 듯한 발언과 행동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 이병주를 재평가 내지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이제야 시작됐다. 최근 결성된 ‘이병주 기념사업회’는 지난 7일 그의 고향인 경남 하동군 섬진강변에서 이병주문학제를 열었다. 기념사업회 50여명의 발기인 면면이 흥미롭다. 문학평론가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와 정구영 전 검찰총장이 공동회장인데, 문학평론가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소설가 이문열씨, 리영희 전 한양대 교수와 허문도 5공 당시 통일원장관 등 어떻게 한자리 모일수 있을까 싶은 사람들이 회원이다.
임헌영씨는 그 사정을 “이병주 문학은 좌익이든 우익이든 인간의 얼굴을 가진 민족운동을 한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산봉우리”라고 말했다. 평소 “역사의 성긴 그물에서 빠져버린 인간군상의 삶을 소설로 쓰겠다”고 했던 이병주가 사후 14년만에 문학의 그물, 그 품이 이 땅의 좌우, 보혁보다 훨씬 넓고 깊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太陽(태양)에 바래면 歷史(역사)가 되고, 月光(월광)에 물들면 神話(신화)가 된다.’ 장편소설 ‘산하’의 표지 안쪽에 씌어있던 멋드러진 이병주의 문장은 언제 떠올려도 가슴을 뛰게 한다. 그의 전집 30권이 이달 중 출간된다니, 이병주의 박력있는 문장을 오랜만에 다시 만나겠다.
하종오 피플팀장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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