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을 지나 쓰레기봉투를 버리고 총총걸음으로 돌아왔다. 골목 안 어느 집 대문 앞에 내놓은 책 등속에 솔깃했기 때문이었다. 책은 별 거 없었지만 곱다랗게 케이스에 든 영어회화 테이프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모두 공신력 있는 데서 제작한 것이었다. 둘러보고 있을 때 대문 안에서 젊은 아낙이 나왔다. “좋은 교재들이에요. 빠진 번호 없이 다 있어요.” 그 아낙은 내게 하나라도 더 가져가게 하려고 독려했다.
그러면서도 그 와중에 도저히 못 견디겠다는 듯이 “아 참, 이건 내놓을 게 아닌데”하며 뭔가를 도로 갖고 들어갔다. 나는 두 세트를 골라서 낑낑거리며 한 아름 들고 왔다. 시간 나는 대로 한 번씩만 봐도 그게 어디야? 전부 아홉 개니까 아홉 시간에서 열여덟 시간 소요될 것이었다.
그게 벌써 지난 가을 일이다. 저걸 빨리 봐야 치울 텐데. 문자 그대로 발 디딜 틈 없어진 방에서 어제도 그걸 겅중겅중 넘어 다니다, 봄맞이 청소를 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사 제쳐놓고 우선 케이스 ‘No. 1’을 열었다. 아, 이럴 수가? 비디오테이프가 하나 들었다고 철석같이 생각했던 케이스 안에 여섯 개의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었다. 모두 다해서 쉰 네 개!
시인 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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