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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그날 '우리의 소원' 지휘가 내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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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그날 '우리의 소원' 지휘가 내 소원

입력
2006.04.16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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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원은 남북통일이 되면 판문점에서 남북합창단이 부르는 ‘우리의 소원’을 마지막으로 한 번 지휘해보는 거예요. 그 후엔 ‘우리의 소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흘러간 옛노래가 됐으면 좋겠어.”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따라부르는 국민동요 ‘우리의 소원’을 작곡한 작곡가 안병원씨가 팔순을 기념해 회고록 ‘음악으로 겨레를 울리다’(삶과꿈)를 발간했다. 1926년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음대를 졸업한 그는 경기여중ㆍ고, 경복중ㆍ고, 용산중ㆍ고에서 음악을 가르친 후 숙명여대 음대 강사로 일하다 74년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회고록 출판기념회를 위해 한국을 찾은 안씨는 “지난 80년을 되돌아 볼 때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은 ‘우리의 소원’ 만들었을 때”라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어떻게 그런 노래를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라고 말했다.

45년 ‘봉선화동요회’를 창단해 동요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창작동요를 보급시킨 안씨는 ‘우리의 소원’ 외에도 ‘구슬비’ ‘가을 바람’ ‘학교 앞 문구점’ ‘나 혼자서’ ‘푸른 바람’ 등 300여 곡의 동요를 만들었다.

대학생이던 47년 KBS 전신인 서울중앙방송의 의뢰를 받아 어린이 노래극용으로 만든 ‘우리의 소원’은 당초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이라는 가사 대신 ‘우리의 소원은 독립, 꿈에도 소원은 독립’이라는 단어로 작사됐다.

작사자는 선친인 안석주(1950년 작고)씨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48년 국정교과서에 이 곡이 수록되면서 가사가 바뀌었어요. 당시 봉선화동요회 단원들이 이 노래를 처음 부른 ‘가수’들이었는데,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 이수성 전 총리 부인 김경순씨 같은 사람들이죠. 다들 잘 커서 시집들을 잘 갔어. 허허.”

그는 54년에는 한국어린이음악사절단 단장 겸 지휘자로 활동하며 국내 최초로 미국 48개주 순회 공연을 펼쳤다. “일제 때 빈소년합창단이 출연한 영화를 봤는데, ‘야~’ 하는 탄성을 멈출 수가 없었어요. 그때 결심했지. 나중에 크면 어린이들 데리고 노래하면서 세계일주를 해보자 하고. 그게 그때 이루어졌어요.”

안씨는 74년 캐나다로 이민 간 뒤에도 토론토 YMCA 합창단, 천주교 성가대 지휘자 등으로 활동하며 작곡집 ‘우리의 소원’과 음반 ‘통일기원 노래’를 내는 등 왕성한 활동을 계속했다.

“세계 각지로 공연을 많이 다녔지만 제일 감격적인 음악회는 90년 남북송년음악회예요. 북한 음악인들과 함께 공연하며 6번이나 울면서 관중들과 ‘우리의 소원’을 불렀지. 이상하게 어디를 가서 불러도 이 노래를 부르면 울음바다가 됩디다.”

안씨의 회고록 출판기념회는 21일 오후 6시 서울 YMCA 2층 대강당에서 열린다. 5월 10일에는 청강문화산업대학 교정에 ‘우리의 소원’ 노래비가 건립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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