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명의 경주자는 100㎙ 앞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경주자가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 “상속세 폐지는 2020년 올림픽팀을 2000년 올림픽팀 금메달수상자들의 아들들로 뽑자는 것과 다름없다.” 감세를 통한 경기부양을 위해 조지 부시 대통령이 2003년 상속세를 폐지하려 하자 이런 비유를 들어가며 극력 반대했던 이는 학자나 시민운동가 아니라 미국의 최고 갑부들이었다. 앞 부분은 세계 최고 부자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뒷 부분은 세계 두번째 부자이자 금융황제로 불리는 워렌 버핏의 발언이다.
▦ 두 사람은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는 세계적 투자가 조지 소로스 등과 함께 ‘책임 있는 부자(Responsible Wealth)라는 단체까지 결성해 상속 반대 운동을 해오고 있다. 게이츠는 3명의 자녀들에게 1,000만 달러(약 95억원) 정도의 재산만 남겨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공언했다.
버핏은 더 나아가 모든 재산을 자기 이름을 딴 재단에 기부하고 세 자녀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겠다고 밝혔다. 부자들이 자신들을 위한 상속세 폐지를 오히려 반대하는 이 일화는 미국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과 부자들이 존경 받는 이유를 함축적으로 설명해준다.
▦ 시선을 국내로 돌리면 낯이 뜨겁다. 검찰에 의해 속속 드러나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불법 행위들의 출발점은 경영권 승계, 즉 재산의 상속이다. 현대만이 아니다.
참여연대가 38개 그룹 250개 기업을 대상으로 지난 10년간의 주식거래를 분석해 문제가 있다고 최근 발표한 70여건의 거래 대부분도 종국에는 재산과 경영권 세습을 위한 작업이다. 이 조사 결과를 그대로 사실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상속이 당연한 것은 물론이고 갖가지 방법을 총동원해 당연히 내야 할 상속세마저도 회피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 부끄러운 우리 현실이다.
▦ 상속세 납세실적을 보더라도 그렇다. 역대 최고 납세액은 2004년 작고한 설원량 대한전선 전 회장의 유족들이 낸 1,355억원이다. 2위는 교보생명 1,338억원, 3위는 태광산업 1,060억원 순이다.
모두 대재벌이 아니라 중견 재벌, 중견 기업가문들이다. 삼성, 현대자동차, SK같은 4대 그룹의 기업자산을 이들 기업과 비교한다면 최소 몇 배, 최고 몇 십 배는 넘을 것이다. 현대차 사태는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다는 메시지다. 기업인이 존경 받는 사회 분위기는 국민이 아니라 기업인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다.
배정근 논설위원 jkpa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