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추적 비가 흩날리던 어느날 밤 지하철 역사. 술에 취한 20대 여성이 숨졌다. 성추행 흔적이 남았을 뿐 다른 증거는 없다. 현장엔 30대 남성이 있었다. 그는 지나가다가 쓰러진 여성을 발견해 돕고 있었노라고 진술했다. 둘은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그러나 남자의 가방에서 음료수병이 나왔다. 병 안엔 클로로포름(마취제의 일종)이 담겨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성적 환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성을 마취시켜 숨지게 한 것으로 밝혀졌다.
범행 도구(음료수병)가 발견되지 않았다면 모호한 범행 동기와 목적 때문에 사건은 자칫 미제로 남을 뻔했다. 사회 통념과 상식을 비웃는 이른바 ‘무동기(이상동기) 범죄’의 전형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수사 기법이 ‘프로파일링(Profilingㆍ범죄심리분석)’이다.
미국의 FBI가 1978년 도입한 프로파일링은 외국에선 관련 드라마를 쏟아낼 만큼 정착됐지만 아직 국내에선 생소한 분야다. 2000년 2월 서울지방경찰청에 프로파일링팀(범죄분석팀)이 생기면서 권일용(42) 경사가 국내 첫 프로파일러가 됐다.
4년 뒤 윤태일(34) 경사에 이어 올해 1월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김경옥(30) 김윤희(28) 경장 등 두 명의 여성 프로파일러가 합류했다. 그들을 만났다.
▦ 피 말리는 범죄의 재구성
“이게 혈흔인가? 족적은? 칫솔 봉지는 있는데 칫솔은 어디로 간 거야?” “증거를 없애려고 범인이 가져간 것 같아요.”
10일 서울경찰청 과학수사계 회의실. 4명의 프로파일러가 벌써 몇 시간째 벽면에 붙은 화장실 사진을 들여다보며 묻고 답한다. “동선을 보니 계획된 살인은 아닌데….” “피해자가 윤락 여성인 걸로 봐선 화대 시비 때문인 것 같아요.” “수건은 왜 수도꼭지 위에 있을까?” 범인의 작은 움직임 하나까지 잡아내려고 안간힘이다.
지난 주말 서울의 한 여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었다. 현장 사진과 관련 기록을 이 잡듯 한다. 슬리퍼의 위치, 수건의 흐트러짐도 놓치지 않는다. 분석회의와 자유토론을 끝낸 뒤에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작성했다. 자료는 담당 형사에게 제공된다.
다행히 범인은 곧 붙잡혔다. 그렇다고 끝난 게 아니다. 용의자 면담이 이어진다. 5시간 넘게 이어진 면담을 통해 프로파일러는 범인의 성격과 행동 유형을 분석해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한다. 윤 경사는 “무동기 범죄는 수사의 실마리조차 찾기 힘들지만 미지의 범인에 대해 하나씩 알아가는 게 매력”이라고 했다.
▦범인은 범죄 현장에 돌아오지 않는다?
권 경사는 “증거 한 줌 남기지 않는 지능 범죄와 연쇄 범행이 늘고 있는 터라 범인을 쫓는 자는 늘 뒤쳐진다”고 했다.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범인은 반드시 범죄 현장에 돌아온다’는 속설도 깨졌다고 했다. 이 때문에 프로파일러는 본인이 오롯이 미지의 범인이 되야 한다. 범인 입장에서 보고 듣고 먹고 느끼고 생각하고 움직여야 한다.
프로파일러는 숲 전체를 보는 존재다. 감식반이 증거 하나하나에 집착한다면 프로파일러는 범행 현장을 두루 살피고 범인의 행동 전체를 유추한다. 말이 쉽지 피 말리는 작업이다. 이들에게 실패는 일상이다. 김경옥 경장은 “전혀 모르는 범인의 행동 양식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이라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했다.
범죄 해결에 대한 강박감과 범죄 현장의 참혹함도 이들을 옥죈다. 윤 경사는 “분석하다 보면 피해자가 죽지 않아도 될 사건이거나 미제로 넘어가 다른 피해자가 생길 때가 가슴 아프다”고 했다. 김경옥 경장은 “피해자의 고통이 전가돼 수사관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시달리기도 한다”고 전했다.
▦프로파일러에 얽힌 오해와 편견
프로파일러는 드라마에서 보듯 화려하지는 않다. 윤 경사는 “드라마는 1시간 안에 사건을 해결하지만 실제는 많은 시간과 인내, 실패가 필요하다”고 했고, 김윤희 경장은 “영화처럼 현장 전체가 그대로 보존된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프로파일러는 범인을 직접 잡는 경찰이 아니다. 권 경사는 “범행 현장을 분석해 범인의 성격, 행동, 직업 등을 좁혀주는 것, 수사를 지원해주는 것이 프로파일러의 몫”이라고 했다.
전국엔 이들 외에도 각 지방청마다 1명 정도의 프로파일러가 활동하고 있다. 경찰청은 올해도 범죄분석요원 14명을 특채할 계획이다.
고찬유 기자 jutda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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