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민족주의의 칼날이 무슨 이유로든 칼집을 벗어났을 때, 그 칼끝은 직접 외국어를 향하기보다 민족어 안의 ‘불순물’ 곧 외래어를 향하는 것이 예사다. 외국어 자체는 언어민족주의자들로서도 맞서 싸우기가 너무 버거운 상대다. 반면에 외래어는 사뭇 만만한, 그러나 가증스러운 내부의 적으로 비친다.
한국어의 경우, 내부의 외래 요소에 대한 공세가 눈에 띄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이 전투의 첫 지휘관은 주시경(1876~1914)이었고, 그 주적(主敵)은 한국인들이 천 수 백년 동안 함께 살아온 한자(어)였다. 그러나 주시경은 요절했고, 그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최현배(1894~1970)가 새 지휘관을 자임했다. 사실 새 지휘관은 여럿이었으나, 최현배의 목소리가 가장 큰 메아리를 얻었다.
민족주의적 열정과 학문적 재능이 스승 못지않았고 스승과 달리 요절하지도 않은 터라, 최현배는 20세기 한국어 연구와 한국어 운동에 커다란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한 겨레의 문화 창조의 활동은, 그 말로써 들어가며, 그 말로써 하여 가며, 그 말로써 남기나니”로 시작하는 유명한 머리말을 얹은 ‘우리말본’(1937)은 그 이론적 섬세함과 우아함으로도 조선어학의 높다란 봉우리를 이뤘지만, 문법 용어들을 한자어가 아니라 고유어로 새로 지어 썼다는 점에서 조선어운동의 귀중한 문건이기도 하다. 해방 뒤 책 앞머리에 붙인 ‘일러두기’에서 최현배는 ‘우리 말본’의 갈말(술어)을 모두 ‘순 배달말’로 새로 지어 쓴 이유를 밝힌 바 있다.(상자 기사 참조)
말소리갈(음성학), 씨갈(품사론), 월갈(문장론) 세 분야를 망라한 ‘우리 말본’의 고유어 용어들은 오늘날 한국어학계의 변두리로 밀려났지만, 한 시대의 민족주의적 열정을 인상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최현배와 그 동료들의 이런 민족주의적 언어운동은 해방 뒤 한글학회를 중심으로 국어순화운동으로 이어졌다. 민족주의가 남한보다 더 드셌던 북한에서는 아예 정권 차원의 대대적인 말다듬기 운동이 벌어졌다. 정권 초기에 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사람들 가운데 김두봉(1890~?)은 주시경의 제자였고, 이극로(1897~1982)는 한글학회 전신인 조선어학회의 우두머리였다.
언어 민족주의가 모국어에서 외래 요소를 솎아내는 방식으로 발현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드문 일이 아니다. 17세기 이래 독일에서 부침을 거듭한 언어순화운동이 대표적 예다.
1617년 루트비히 폰 안할트라는 독일인은 그리스-라틴어나 프랑스어 같은 ‘문화어들’에 깊이 감염된 독일어를 ‘순화’하기 위해 ‘결실의 모임’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종려나무 교단’이라고도 불렀던 이 단체는 독일 여러 곳에 사무실을 두고 ‘애국적’ 인사들을 모아 독일어의 독일화(Verdeutschung)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그 뒤 독일 전역에서 우후죽순처럼 독일어 순화운동 단체들이 생겨났다.
이런 언어민족주의자들의 수백 년에 걸친 노력에 힘입어 적잖은 ‘순수’ 독일어 단어들이 태어났다. 이들은 Grammatik(문법)을 대치하기 위해 Sprachlehre라는 말을 만들었고, Verbum(동사)을 대치하기 위해 Zeitwort를 만들었으며, Appetit(식욕)에 대해서는 Esslust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어떤 신조어들은 동시대인에게 이물감을 주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또 다른 어휘들은 일단 받아들여졌다고 하더라도 이내 사라졌다.
오늘날 Nase(코)를 Gesichtvorsprung(얼굴의 튀어나온 부분)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신조어로 부르는 독일인은 없다. 더구나 이 Nase는 게르만계의 고유어인데도 외래어로 잘못 알려져 한 때 퇴출 대상이 되는 촌극이 빚어졌다. 독일의 이런 언어순수주의는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 때 절정을 이뤘다.
라틴어-프랑스어 계통의 말을 고유어로 바꾸려는 노력은 영국에서도 있었다. 영어의 게르만적 순수성 회복을 필생의 업으로 여겼던 19세기 시인 윌리엄 반스는 conscience(양심)라는 말을 몰아내기 위해 inwit라는 고대 영어를 되살려냈고, ornithology(조류학)에 맞서 birdlore라는 말을 새로 만들었으며, synonym(동의어)을 대치하기 위해 matewording이라는 말을 지어냈다. 그러나 오늘날 영어권의 사전 편찬자들은 그의 신조어들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그가 grammar(문법)의 의미로 만든 speechcraft와 astronomy(천문학)의 의미로 만든 starlore가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실려있을 뿐이다. 외래어 사냥이 영국에서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은 그것을 집단 운동 차원에서 실천한 독일과 달리 몇몇 개인들이 호사취미 수준에서 꾀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인위적 언어 순화운동은 대체로 실패한다. 20세기 들어 영어에 그리도 거세게 저항했던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다. ‘핫도그’(hot dog)를 ‘시앵 쇼(chien chaudㆍ뜨거운 개)’로 바꾸려던 순화론자들의 노력은 이내 웃음거리가 됐다.
프랑스인들이 거리에서 사 먹는 것?‘뜨거운 개’가 아니라 여전히 ‘옷도그(hot-dog)’다. 민족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감정 상태이므로 언어순화운동은 어떤 언어공동체에서도 적잖은 지지자들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반면에 언어순화운동이 어느 정도 효과를 내려면 권력이 고도로 집중된 전체주의 사회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엄연하다.
북한에서 이 운동이 그나마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 사회체제의 경직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불길한 함축은 고귀한 민족애의 실천형식으로서 언어순화에 매력을 느끼는 선남선녀들이 특히 곱씹어보아야 할 생각거리다.
물론 서정시에서 고유어의 사용은 독자의 마음을 깊고 넓게 뒤흔드는 비결 가운데 하나다. 고유어는 모국어의 속살이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시의 역사에서는 김영랑이 그것을 멋들어지게 증명해 보인 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서 배워 사람들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고유어 얘기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민족주의적 열정으로 만들어낸 신조어 얘기가 아니다. 신조어는, 그것이 설령 고유어의 옷을 걸쳤다 하더라도, 서정시의 언어로는 매우 부적절하다.
그 정서적 환기력이 한자어나 다른 외래어보다도 외려 더 작기 때문이다. 언어순화 운동가들이 만든 신조어들은 상상 속 민족과는 관련이 있을지 모르나 현실 속 민중으로부터는 동떨어져 있다. 그것은 민중의 언어가 아니라 편협한 지식인의 언어다.
‘우리 말본’에는 고유어 신조어 뒤에 괄호를 덧대 그 뜻을 한자(어)로 풀이해주고 있는 예가 많다. 일몬(事物), 모도풀이(總論), 부림말의 되기(目的語의 成立), 베풂월(敍述文), 시킴월(命令文), 물음월(疑問文), 껌목(資格), 씨가름(品詞分類), 제움직씨(自動詞), 남움직씨(他動詞), 가림꼴(選擇形), 이적 나아가기 끝남(現在進行完了), 이붕소리되기(口蓋音化) 하는 식이다. 고유어는 괄호 밖에 노출돼 있고, 한자(어)는 괄호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事物’이나 ‘資格’이 괄호 안에서 앞말을 풀이해주고 있다는 것은 그것들이 ‘일몬’이나 ‘껌목’ 같은 ‘순 배달말’보다 외려 이해하기 쉽다는 뜻이다. 일러두기의 ‘갈말(術語, 술어)’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術語, 술어’가 괄호 안에 있다는 것은 이 말이 ‘갈말’보다 더 명료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본디 있는 쉽고 명료한 말을 놓아두고 왜 굳이 설고 어려운 말을 새로 만들어 써야 할까? 신조어가 아니더라도, 사전 속에 갇혀 먼지를 뒤집어쓴 지 오래돼 사람들에게 이미 잊혀버린 ‘고유어’들 역시 어렵고 설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고유어들은 어렵고 낯설기가 외래어 정도가 아니라 외국어에 견줄 만하다.
사실 그 ‘고유어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외국어나 다름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런 고유어 술어는 지적 폐쇄주의의 한 표현일 수 있다.
이런 순화운동의 방식이 대체로 번역차용(외국어 표현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 형태소를 일 대 일로 번역하는 것) 형식의 베끼기(calque)여서, 거기서 어떤 정신의 확장이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야겠다. ‘자동사’와 ‘제움직씨’, ‘일몬’과 ‘사물’, ‘모도풀이’와 ‘총론’은 똑같은 구조를 지닌 말이다.
다시 말해 앞말을 뒷말로 베껴낸다고 해서, 거기서 새로운 지적 지평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매우 하찮은 지적 작업이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쉽게 억누를 수 없는 에너지다. 말하자면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하찮은 지적 작업은 앞으로도 운동량을 쉬 잃지 않을 것이다.
▲ '우리말본' 일러두기에서
이 책에는, 말본의 갈말(術語, 술어)을 모두 순 배달말로 새로 지어 썼다. 이는, 첫째, 배달말의 본을 풀이함에는 배달말로써 함이 당연하며, 자연스러우며, 따라 적절하며, 이해되기 쉽다고 생각함이 그 까닭의 하나이요; 두째는, 다른 나라말에서 쓰는 갈말(術語)은, 그 나라말에 맞도록 한 체계에서 일정한 뜻을 가진 것인 때문에, 그것과는 체계가 다른 배달말의 본을 풀이함에는 적당하지 못하므로, 그것을 여기에 그냥 꾸어쓰기 어려운 것이요; 세째는, 나의 말본 체계가 앞사람의 그것과도 매우 다르기 때문에, 앞사람의 지어놓은 갈말(術語)이 약간 있지마는, 그것은 수에서 아주 부족할 뿐 아니라, 그 체계가 다르기 때문에 대다수가 그대로 받아쓸(襲用) 수 없었고; 네째는, 새로운 사상의 체계에는 새로운 표현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대한 말본의 갈말(術語)만이라도 순 대한의 말로 하여서 대한 사람의 독특한 과학적 노작(勞作)의 첫걸음을 삼고자 함에 있다.
객원논설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