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든 그 외면에 내걸린 아름다움에 인간의 마음이 움직여 왔다는 건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당장 그 속에 내면의 빈약함이나 얕음, 열등함 등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는 지식인들의 거듭된 경고에도 말이다.
오히려 현대 사회는 사물의 표피가 갖는 힘에 대해 극도로 집약적으로 연구하고 그 꽃을 피워나가고 있을 뿐이다. 그 표층적 이미지의 얇은 두께에 재어져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거듭 발굴해내고 있다고 할까.
●외피란 내면을 알리기 위한 첫 통로
역시 이미지들의 축제로 들뜬 도시와 사회는 이를 한 번 벌인 이상 마칠 생각은 없어 보인다. 사실 껍질이란 존재는 그 얄팍함 탓에 잠재적 기만과 현혹의 물질로, 필요 이상의 오명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리 보면 외피란 그 내면의 매력 또는 본질의 우수함을 실제 경험에 앞서 우선 알리기 위한 유일한 채널이기도 하지 않은가.
즉 그것이 사물이든 인물이든 외피나 이미지는 기실 본질의 경험으로 안내하는 예비의 제스처 또는 초청의 손짓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 이 같은 순간에야 비로소 대상의 안팎은 이상적인 관계에 놓인다고 본다.
예컨대 나이 든 여성이 주름살 제거 시술을 통해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는 것은 한편으로 그녀의 본연에 아직 꿈틀대고 있었던 청년의 활기가 비로소 타인에게 경험될 창구를 확보한다는 뜻이며 이를 넘어서 이해되어서는 곤란하다.
내면의 젊음 없이 무턱대고 연륜이 곱게 내려앉은 주름살부터 없애는 불균형은 곧 희화(戱畵)적 이미지외엔 남길 것이 없기에. 여성들이 성형으로 자신의 결점을 제거하거나 매력을 얻게 되는 사건 역시 내면의 아름다움이 발현되는 경로를 오랫동안 막고 있던 어떤 장애를 제거하는 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건축의 외관을 새롭게 하는 일을 영어로 페이스리프트(facelift)라 부르기도 한다. 분명 주름살 제거 시술의 그것에서 가져온 최근의 용어일 거다. 오래된 도시일수록 필연적으로 깊은 주름살들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그 주름살들의 대부분은 고운 결로 빛나며 그 깊이만큼의 의미와 아름다움으로 도시를 풍경에 젖게 하기 마련이다. 뒤늦게나마 우리의 도시는 근대화란 이름으로 탈취당했던 시간성을, 그 주름의 골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기만적 이미지라면 이미 등 돌려
문제는 한때 개발이란 이름으로 거리를 순식간에 채웠던 삭막한 구조체들의 불행한 풍경이다. 이들의 표면에 두서없이 얽힌 주름은 그저 자본주의 특유의 어둡고 우울한 내면의 발로 이상으로 취급될 수 없다.
이러한 거리들이야말로 대거 표피 중심의 시술이 가장 유효한 존재란 생각이다. 우선은 밝고 자신에 찬 아름다운 표피들만으로도 도시가 걸린 우울증은 한결 가셔질 것이다. 추후 각 건축물 내부의 풍경은 개체 자신들의 몫으로 남겨도 된다. 이미 내면이나 본질을 보증하지 않는 기만적 이미지들에 대해선 간단히 등을 돌리는 현대사회 아닌가.
김헌 / 건축가ㆍ어싸일럼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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